ⓒ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북로망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북로망스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백희성의 장편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건축가의 시선으로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바라본 작품이다.

건축가이자 예술가로 활동해 온 백희성은 아시아인 최초로 프랑스의 젊은 건축가에게 수여되는 '폴 메이몽 상'을 받은 인물로, 실제 건축 현장과 예술적 경험을 동시에 쌓아온 작가다. 

그는 파리의 여러 저택을 직접 찾아가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이 과정에서 얻은 기억의 조각들을 한 편의 소설로 다시 설계했다.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그렇게 태어난, 건축이 사람의 마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북로망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북로망스

◆ 건축 속에 남은 가족의 이야기

이야기는 젊은 건축가 뤼미에르가 파리 시테섬의 낡은 저택을 구입하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저택의 주인 피터는 시각장애를 가진 노인으로, 집을 팔기 전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이 집을 사려면, 아버지가 남긴 흔적을 찾아주세요." 

뤼미에르는 건축가로서의 직관과 호기심을 따라 집을 탐색하며, 벽과 계단, 종탑, 오래된 도서관 속에 남은 흔적을 하나씩 마주한다. 피터의 아버지 프랑스와는 생전에 건축가였고, 그의 설계에는 미처 전하지 못한 감정과 가족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가며 뤼미에르는 '시간이 쌓인 건축'을 마주하고, 결국 공간이 한 가족의 기억을 품고 있음을 깨닫는다. 

작품 속 문장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사연이 있듯이 집도 저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다"는 이 소설이 전하려는 핵심을 압축한다. 집은 단순히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관계와 시간의 층이 쌓여 형성된 기억의 장소다. 시간이 건축의 벽을 따라 흐르듯, 그 안에 머문 감정과 흔적이 사람의 삶을 완성한다.

◆ 빛이 드러내는 건축의 기억

이 소설에서 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억을 드러내는 언어로 작동한다. 빛의 각도와 그림자의 움직임, 창문을 통과하는 조도 변화는 인물의 감정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건축의 구조 안에 서사를 녹여낸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북로망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북로망스

소설 속 또 다른 문장 "그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그 집의 역사가 된다"는 공간을 시간의 기록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건축의 정밀함 속에서 인간의 정서가 드러나고,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순간마다 잊혔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공간은 사람의 삶을 담는 그릇이자, 시간이 머무는 장소로 그려진다. 이야기는 과장된 장치 없이 차분하게 흘러가지만, 여운은 길게 남는다. 세월이 스며든 집 한 채를 따라가듯, 작은 단서와 빛의 변화를 통해 한 인간의 기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결국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시간이 쌓여 공간이 되고, 그 공간이 다시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