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초콜릿의 풍부하고 복합적인 맛은 원료인 카카오콩의 발효 과정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카카오콩 발효는 농장 환경에 존재하는 다양한 미생물에 의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맛과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영국 노팅엄대학을 비롯한 국제 연구팀은 이 발효 과정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특정 미생물 조합을 활용해 고급 초콜릿의 맛을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미생물학(Nature Microbiology)'에 발표됐다.
◆ 발효의 비밀, 실험실에서 재현한 초콜릿 맛
연구팀은 콜롬비아 주요 카카오 생산지인 산탄데르, 위야, 안티오키아 농장에서 카카오콩 발효 과정을 정밀 조사했다. 그 결과, 산탄데르와 위야산 카카오콩은 구운 견과류와 익은 베리, 커피 향이 어우러진 복합적이고 섬세한 풍미를 보였지만, 안티오키아산 카카오콩은 단순하고 쓴맛이 강했다. 카카오콩 자체의 유전적 차이는 거의 없었기에, 맛의 차이는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요인과 미생물 군집 구성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아래 이미지는 카카오콩 발효 과정을 시간 순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0시간(발효 시작)부터 168시간(7일)까지, 카카오콩이 흰색에서 점차 갈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발효가 진행될수록 색과 질감이 바뀌며 풍미 형성의 시각적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연구팀은 발효 과정에서 나타나는 pH와 온도 변화, 그리고 미생물 군집 구성(마이크로바이옴)이 최종 초콜릿 맛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임을 확인했다. 특히 효모 종인 토룰라스포라(Torulaspora)와 사카로마이세스(Saccharomyces)가 섬세한 풍미 형성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핵심 미생물 9종(세균 5종, 효모 4종)으로 구성된 ‘합성 미생물 군집(SYNCOM)’을 스타터 배양체로 만들어 실험실 발효에 적용한 결과, 자연 발효와 유사한 맛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 위기 속 초콜릿, 과학이 품질을 지킨다
초콜릿 원료가 되는 카카오 최대 생산지인 서아프리카(코트디부아르·가나)에서는 이상고온과 폭우, 병충해가 반복되면서 농장이 황폐화되고 있다. 카카오나무는 기온이 32℃를 넘으면 성장과 열매 맺기가 어렵다. 이에 과학자들은 미생물 발효 공정 표준화와 카카오 세포 배양 기술로 대응하고 있다.
이번 연구로 토룰라스포라와 사카로마이세스를 조합하고 온도·pH를 통제함으로써 원하는 맛을 재현할 수 있음이 입증됐다. 또한 초콜릿 제조업체 바리칼리보(Barry Callebaut)는 스위스 취리히 응용과학대학(ZHAW)과 협력해 카카오 세포 배양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카카오나무가 아닌 세포를 배양해 초콜릿 원료를 생산하면, 기후와 온실가스 배출 문제 없이 안정적 생산이 가능하다. 미생물 발효 기술과 세포 배양 기술은 서로 보완하며, 기후변화와 지역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일관된 품질의 초콜릿을 공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연구 공동저자이자 식물유전학자인 데이비드 고포르찬(David Gopaulchan) 박사는 "이번 연구는 발효 과정의 블랙박스를 규명해, 소비자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풍미를 선사할 수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초콜릿 품질 향상이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