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1901년, 그리스 안티키티라 섬 인근 해역의 난파선에서 발굴된 수수께끼의 장치 하나가 인류 고대 기술사에 전환점을 불러왔다. 수십 개의 정밀한 톱니바퀴로 구성된 이 장치는 별과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복잡한 기능을 갖춘 '세계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로 불려왔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는 이 전설적인 유물의 실체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100년 넘게 ‘정밀 과학기술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이 장치는, 과연 실제로 작동했을까.
새롭게 공개된 분석은 이 기계가 정밀한 계산보다는 ‘보여주기용’에 가까웠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고대인의 기술력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 '정밀 계산기'의 환상에 금이 가다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 국립대학교 연구팀은 프리프린트 서버 arXiv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안티키티라 기계(Antikythera Mechanism)가 실제 계산 도구로는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과학매체 사이언스얼럿은 연구팀이 기계 내부에서 발견된 특이한 삼각형 모양의 기어 구조를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수행한 결과, 회전 시 치명적인 간섭과 오차가 발생해 정밀 계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았다고 전했다.
연구를 이끈 루이스 파르도 박사는 "이 기어 구조는 본질적으로 회전에 적합하지 않다"며 "정확한 천문 계산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치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삼각형 톱니는 회전이 부드럽지 않고, 오차가 누적돼 복잡한 천문 주기를 예측하기에는 구조적 한계를 가진다.
또 다른 과학 매체 라이브사이언스는 이 기어 구조가 회전 중 자주 걸리거나 멈추는 현상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이 장치를 '조잡하게 작동하는 장난감(janky toy)'에 비유했다. 이러한 분석은 안티키티라 기계가 고대인의 지식을 시각적으로 시연하거나 과시하기 위해 만든 보여주기용 모형일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 '고대 컴퓨터' 신화...재검토의 시간
안티키티라 기계는 고대 그리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복합 기계식 천문 장치다. 30개 이상의 정밀 기어로 구성된 이 장치는, 태양과 달, 그리고 당시 관측 가능했던 5개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태음태양력을 바탕으로 일식과 월식, 고대 올림픽 같은 주기적 행사의 날짜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해석돼 왔다.
기계의 후면에는 223개월 주기의 사로스 주기(Saros cycle)를 기반으로 일식을 예측하는 시스템이, 전면에는 태양과 달의 위상 변화를 표현하는 원반이 장착되어 있다. 이러한 정교한 설계는 20세기 이후 고대 그리스 기술 문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번 분석은 이와 같은 이상화된 평가에 처음으로 구조적 의문을 제기했다. 회전 시 간섭과 오차를 유발하는 기어 설계가 사실이라면, ‘고대의 슈퍼 컴퓨터’라는 수식은 다소 과장된 해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연구는 아직 학술지에 정식 게재되지 않은 프리프린트(preprint) 논문으로, 동료평가(peer-review)를 거치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키티라 기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단순한 계산 장치였을까, 아니면 고대 지식 체계를 상징하는 상징물이었을까. 미완의 기어가 품고 있는 그 진짜 용도를 밝혀내는 일은, 고대 기술 문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더 깊게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