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경계를 흔드는 캐릭터의 힘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히어로 영화의 전성기 속에서 관객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빌런일 때가 많다. 고결하고 정의로운 주인공보다, 때로는 잔혹하고 불안정한 악역에게서 더 큰 매혹을 느끼는 것이다.
최근 대중문화는 영웅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 악역을 전면에 조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단순한 선악 대립을 넘어 상처 입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이야기에서 관객이 더 깊은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악역이 중심에 선 서사는 공식을 깨면서도 현실과 닮아 있어 강한 몰입을 불러온다.
◆ '조커'와 '다스 베이더', 빌런이 주인공이 될 때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Joker, 2019)'는 광대 분장을 한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악의 화신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주며, 동시대 불안을 대변하는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한편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단순한 적수가 아니라 혼돈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였다. "왜 그렇게 심각해?"라는 대사로 상징되는 그의 광기는, 악역이 단순히 정의의 반대편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시험하는 존재임을 각인시켰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다스 베이더(Darth Vader)는 한때 정의의 편에 섰던 인물이 상처와 집착 끝에 어둠에 빠져들었지만, 마지막 순간 다시 선으로 회귀하는 여정을 통해 빌런의 복잡한 매력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2022년 국제학술지 'Frontiers in Psychology'에 실린 연구 역시 관객이 선한 주인공보다 빌런에게 더 강한 몰입을 느끼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했다.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인물일수록 우리의 불안과 닮아 있기에, 그들의 서사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스 베이더나 조커처럼 처음부터 악하지 않았던 캐릭터는 과거의 상처와 불운으로 인해 어둠의 길로 들어선다. 그래서 관객은 "저 사람 안에도 아직 선한 마음이 남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게 되고, 빌런이 잠시 선한 면을 드러낼 때 영웅의 행동보다 훨씬 강렬하게 마음을 흔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악역의 재해석, 새로운 공감의 대상
이 같은 흐름은 다른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디즈니 영화 '말레피센트(Maleficent,2014)'는 원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속 절대 악으로 그려지던 마녀를 재해석했다. 실사 영화에서 그는 상처와 배신, 모성애를 지닌 입체적 인물로 다시 태어나며, 악역을 이해와 공감의 대상으로 바꿔놓았다.
한국 영화에서도 최근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하이파이브(2025)'에서는 배우 신구가 연기한 교주가 초능력을 쫓는 집착과 동시에 코믹한 면모를 드러내며,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좀비딸(2025)'은 좀비가 된 딸을 통해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존재조차 절대적 악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빌런은 단순한 대립각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 심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불완전한 모습 속에서 결국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