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무기력증, 염증 물질이 뇌 동기 회로 억제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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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암은 단순히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질병이 아니다. 놀랍게도 암이 뇌 속의 의욕 회로까지 깊숙이 잠식하여 환자의 정신적인 활력마저 빼앗아간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된 논문에서 미국 워싱턴대학교 아담 케펙스(Adam Kepecs) 교수 연구팀은, 암이 특정 뇌 회로를 통해 동기 부여를 억제하고 극심한 무기력 상태를 유도할 수 있음을 실험적으로 명확히 입증했다.

케펙스 교수팀은 암이 진행될수록 환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흥미를 잃고 깊은 무기력감에 빠지는 현상이 단순한 심리적 반응이 아닐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암성 악액질(cancer cachexia)'이라는 심각한 소모성 질환을 앓고 있는 쥐 모델을 이용하여, 뇌 내부의 동기 부여 회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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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간-기저핵 연결 회로 억제… 의욕 상실의 뇌 과학적 메커니즘 규명

암이 몸속에서 서서히 진행되면, 염증을 유발하는 특정 물질(사이토카인)이 혈액 속으로 과도하게 증가한다. 

이를 감지하는 뇌간의 '마지막 구역(area postrema)'이라는 특정 부위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이 마지막 구역은 뇌의 여러 핵심 영역과 복잡하게 연결된 신경 회로를 자극하고, 그 결과 동기 부여와 쾌락 보상 중추로 알려진 '측좌핵(nucleus accumbens)'에서의 중요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분비가 억제된다. 

도파민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 보상 행동, 그리고 집중력 등에 깊숙이 관여하는 핵심적인 신경화학물질이다.

실제 실험에서 암이 진행된 쥐들은 여전히 먹이와 물을 찾는 기본적인 행동은 보였지만, 간단하고 쉬운 과제만을 선택할 뿐, 약간의 노력이라도 필요한 과제 앞에서는 금세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놀랍게도 이러한 행동 변화와 동시에 뇌 속 도파민 수치가 실시간으로 뚜렷하게 감소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실험에 사용된 과제 구성. 위는 간단한 먹이 획득 과제, 아래는 반복 노력을 요하는 물 획득 과제.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Science
실험에 사용된 과제 구성. 위는 간단한 먹이 획득 과제, 아래는 반복 노력을 요하는 물 획득 과제.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Science

◆ 무기력증, 회복의 실마리 찾았다… 새로운 치료 전략 기대

하지만 희망적인 결과도 발견되었다. 연구팀이 인위적으로 뇌 회로를 정밀하게 조절함으로써 암으로 인한 무기력 상태를 효과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뇌간의 마지막 구역에서 염증 신호를 감지하는 특정 뉴런을 억제하거나, 측좌핵에서 도파민 방출을 직접적으로 유도하는 방식으로 뇌 활동에 개입했을 때, 쥐들은 놀랍게도 이전의 정상적인 의욕을 되찾았다. 또한, 염증 유발 물질인 사이토카인의 활성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한 경우에도 도파민 억제 효과가 사라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결과는 암으로 인한 무기력 증상이 단순히 암 자체의 신체적 피로나 심리적인 우울감 때문만은 아닐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오히려 암이 신체의 면역 반응을 유도하고, 이 면역 반응이 뇌의 동기 부여 회로를 직접적으로 억제하는 '신경면역 회로'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케펙스 교수는 과학 매체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을 통해 "이 새롭게 밝혀진 뇌 회로는 암뿐만 아니라 다양한 만성 질환에서 흔히 겪는 무기력 증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며 "이번 발견은 무기력증 치료의 새로운 표적이 될 수 있는 신경 경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아직 동물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암 치료는 물론이고 각종 만성 질환 환자들의 심리적, 정신적 활력 회복을 위한 혁신적인 치료 전략 개발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강력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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