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없는 공간이 여는 제약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우주에서 약을 만드는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중력이 거의 없는 '미소중력(microgravity)' 환경이 지구에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제약 기술을 가능하게 하면서, 제약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미국의 민간 우주제조기업 바르다 스페이스 인더스트리(Varda Space Industries)는 지구 궤도에서 항HIV제 성분을 합성하고 이를 지구로 무사히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지상에서는 불안정했던 약물이 미소중력 환경에서 안정된 결정을 형성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이번 결과는 ‘Return of the Ritonavir: A Study on the Stability of Pharmaceuticals Processed in Orbit and Returned to Earth’라는 사전출판 논문을 통해 공개됐다.
◆ 중력이 사라지면 달라지는 결정 구조
지구에서는 중력 때문에 생기는 침전(sedimentation)과 대류(convection) 현상으로 미세입자나 단백질이 균일하게 성장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약물의 결정 구조가 불안정해지고, 흡수율이나 효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우주에서는 이런 중력 유발 흐름이 거의 사라지기 때문에, 입자들이 서서히 자라며 균일한 결정이 만들어진다. 연구팀은 이 환경에서 약물의 결정형(Form)이 달라질 수 있으며, 이는 약효 지속 시간이나 안정성에도 변화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 전문매체 사이언스얼럿(ScienceAlert)은 "중력이라는 변수 하나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약물의 입자 크기, 형태, 순도를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다"며 "이는 지상 실험실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결정화 조건"이라고 분석했다.
◆ 우주에서 만든 약, 지구보다 안정적이었다
바르다 스페이스는 2023년 궤도에 올린 'W-1' 캡슐에서 항HIV제 리토나비르(ritonavir)의 새로운 결정형(Form III)을 성공적으로 형성시켰다. 이 결정은 지구로 귀환한 뒤에도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했으며, 중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소중력 환경에서는 결정이 천천히 성장해 불순물이 섞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그 결과 순도와 안정성이 높아지며 약효의 지속성도 개선될 수 있다. 반대로 고중력(hypergravity) 환경에서는 입자 크기 분포가 불균일해지는 경향이 확인됐다. 바르다 측은 이러한 중력 차이에 따른 물질 변화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향후 단백질 제제나 생물학적 약물(biologics)에도 기술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바르다 스페이스는 지상에서 결정화가 어려운 분자 구조를 중심으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지구에서는 합성이 불가능했던 의약품의 새로운 제조 경로를 찾는 것이 목표다. 현재 4번째 캡슐인 'W-4'가 궤도를 돌고 있으며, 'W-5'와 'W-6'의 발사는 2026년 초로 예정돼 있다.
2025년 9월, 바르다는 호주의 발사 서비스 기업 서던 런치(Southern Launch)와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이 제휴를 통해 2028년까지 남호주 사막 쿠니바 시험장에 총 20기의 캡슐을 착륙시킬 계획이다. 라세도어 최고경영자(Rasedoor)는 "향후 10년 이내에 우주에서 제조한 약물을 인간에게 투여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바르다는 발사와 귀환 빈도를 점차 늘려, 장기적으로는 매월 또는 그 이상의 주기로 캡슐을 회수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 제약 산업, 이제는 우주로 확장
미소중력 환경은 단순한 실험 조건을 넘어 제약 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상에서 제형화가 어렵거나 결정화가 불안정한 신약 후보 물질들이 우주에서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약물의 결정형이 달라지면 투여 용량, 저장 기간, 부작용 등에 큰 차이가 생길 수 있어 제약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다국적 제약사들도 미소중력 환경을 활용한 신약 연구 협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상용화까지는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이 많다. 발사와 회수에 드는 막대한 비용, 궤도 체류 중 온도·방사선·진동 등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 변수, 그리고 지구 귀환 후 품질 검증과 규제 승인 절차가 남아 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우주에서 만든 약’이 시장에 설 수 있다.
그럼에도 바르다 스페이스는 "향후 10년 안에 인간이 실제 복용할 수 있는 약을 우주에서 생산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번 실험은 제약 산업이 ‘중력’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기술로 넘어서는 변화를 보여준 첫 사례로 평가된다.
과학 전문매체 사이언스얼럿(ScienceAlert)은 "우주는 더 이상 탐사의 무대가 아니라, 약을 제조하는 새로운 공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