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아들 이방원의 ‘무인정사’ 닮은 꼴


롯데그룹 탄생의 배경과 성장과정 재조명


[데일리포스트=김혜경 기자] 고려를 붕괴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 대신 첩의 소생인 여덟 번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하지만 이성계의 이같은 결정은 이방원과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골육상잔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됩니다. 1·2차에 걸쳐 발발한 왕자의 난은 방번과 방석, 방간 등을 차례로 비명에 보내는 한편 이성계마저 왕좌에서 물러나게 만듭니다.


1차 왕자의 난은 태조 7년(1398년)에, ?2차 왕자의 난은 정조 2년(1400년)에 각각 발생합니다.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권력 다툼의 중심에는 바로 이방원이 있었습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형제들 간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일으킨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가 몇 백년이 지난 현재 경영권 계승을 놓고 형제간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롯데그룹에서 재연되고 있습니다.


지난 27일과 28일 롯데그룹이 뿌리를 내린 일본 현지에서 90대 고령의 노부를 등에 업고 시도한 장남 신동주(61)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60) 한국 롯데그룹 회장 간 후계자 쟁탈전 과정에서 신동빈 회장이 부친인 신격호 총괄회장을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해임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신동빈 회장의 주도면밀한 반격에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쿠데타는 하루 만에 진압됐지만 일본 내 한국계 재벌 형제간 경영권 다툼은 전 일본 매체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열도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롯데家 왕자의 난’이 발발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형제가 보유한 지분이 비슷하다는 점과 순환출자구조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일반인들은 간혹 롯데를 두고 한국기업이냐 일본기업이냐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한국롯데와 일본롯데 각각의 법인이 설립돼 있는 만큼 별개의 회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미줄처럼 얽힌 그룹 지배구조를 살펴보다 보면 조금 의문이 듭니다. 한국과 일본 롯데 둘 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곳은 일본 도쿄에 소재한 포장재 회사 ‘광윤사’이기 때문입니다.


왜 일본롯데의 지주회사인 롯데홀딩스가 한국 롯데를 거론할 때 자주 오르내리는지 신격호 총괄회장에게는 왜 일본식 이름이 있는지 등의 의문을 해결하려면 롯데의 창립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일본 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입니다. 그의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시게미쓰 히로유키’, 차남인 신동빈 회장은 ‘시케미쓰 아키오’라는 일본명을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한동안 신격호 총괄회장의 국적을 둘러싸고 세간에서는 말이 많았습니다. 한 때 일본 귀화설이 돌기도 했지만 소문으로만 그쳤을 뿐 그는 현재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울산에서 태어난 신 총괄회장이 어떻게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1922년생인 신격호 회장은 단돈 80엔을 들고 1940년대 초반 일본으로 건너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 끝에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비누, 화장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 연구소는 롯데그룹의 모체가 됩니다.


그 후 우연한 기회로 츄잉껌을 접한 신 회장은 1948년 일본에서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껌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롯데라는 사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등장인물인 샤롯데에서 따온 것입니다.


오늘날 롯데의 탄생은 껌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껌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껌 판매에 몰두하던 이 시기에 신 회장은 현 부인인 ‘시게미쓰 하츠코’와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첫째 부인은 앞서 신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결혼한 노순화씨로 1951년 세상을 떴습니다. 노순화씨와 신 회장 사이에는 신영자 현 롯데복지장학재단 이사장이 태어났습니다.


하츠코 부인과의 결혼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츠코 부인의 외삼촌은 1930년대 주중 일본대사를 지낸 ‘시게미쓰 마모루’입니다. 그는 1945년 미 전함 미주리호에서 거행된 항목문서 조인식에 일왕 히로히토와 함께 목발을 짚고 참석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이보다 앞선 1932년 그는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출신이었던 신 회장이 일본에서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성실함도 한 몫을 했겠지만 하츠코 부인의 집안 내력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신 회장의 일본명이 시게미쓰 다케오라는 점이 이같은 주장에 더 설득력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신 회장과 하츠코 부인 사이에서 동주, 동빈 두 형제가 태어났습니다. 신 회장은 혼맥의 힘을 바탕으로 일본에서의 지지를 더욱 굳건히 다진 후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1986년 롯데제과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2007년 일본 롯데는 지주회사 제체로 전환하고 ‘롯데홀딩스’를 지주회사로 세웁니다. 반면 한국 롯데그룹은 지주회사 체제가 아닌 호텔롯데, 롯데쇼핑 등을 중심으로 한 복잡한 순환출자구조를 가지게 됐습니다. 한국 롯데에서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계열사는 호텔롯데입니다.


그러나 지주회사격인 호텔롯데의 지분 90% 이상이 롯데홀딩스를 대주주로 일본계 투자회사 등이 나눠가지고 있어 한국 롯데를 지배하는 것은 사실상 일본 롯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에 롯데 계열사 한 관계자는 “한국롯데와 일본롯데는 이름만 같을 뿐 별개의 회사”라면서 “한국롯데에서 창출한 수익은 국내에서만 투자되며 일본 쪽도 마찬가지라도 알고 있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롯데는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 롯데는 차남인 신동빈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한다는 암묵적인 공식이 업계 전반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신 전 부회장이 한국 롯데의 모태인 롯데제과의 지분을 야금야금 모으기 시작하면서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형제 간 갈등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됐습니다.


‘롯데판 왕자의 난’ 사태로 한일 양국에서 신동빈 회장의 체제가 더 굳어졌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복잡한 순환출자구조와 신 회장의 계열사 지분 장악력이 다른 형제들보다 월등하지 못한 점은 향후 3차 난이 발발할 수도 있는 불씨를 여전히 안고 있습니다. 특히 롯데홀딩스를 지배하는 ‘광윤사’의 미스테리한 지분구조도 배제할 수 없는 변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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