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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차관 받고 굴욕적 한일협정…김종필 전 총리 ‘사망’

5.16 쿠데타·굴욕적 한일협정으로 국민 저항 받기도

[데일리포스트=송협 기자] 5.16군사 쿠데타를 통해 시작된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비어있는 곳간을 채우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 출범 초기 미국의 원조가 대폭 삭감되면서 당시 최대 국정 현안이 민생고 해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 바로 대일(對日)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바탕으로 자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이른바 꼼수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이 같은 복안을 지근에서 지켜보며 협상에 나선 이가 바로 박정희 쿠데타 정권의 주역이며 박 정권의 처조카 사위였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다. 박정희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일본과 막후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일본이 지난 36년간에 걸친 식민지 수탈을 공식적으로 시인하지 않고 어떠한 보상도 약속하지 않은 이 굴욕적인 협정 체결을 놓고 국민들이 대규모 반대 시위에 나섰지만 박 정권은 이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하는 6.3사태를 촉발시켰다.

일제 강점기 시기 피해자들과 그 나라에 보상은커녕 소송조차 할 수 있는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에 1억 달러 이상 상업 차관을 일본에게서 끌어 오는데 역할을 했던 이가 바로 김종필 전 국무총리다.

1962년 11월12일 박정희 정권의 최측근인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합의된 이 굴욕적인 제2의 을사조약 체결로 해방 이후 70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 일본은 위안부 문제와 독도영유권 문제에서 당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를 확보한 것이다.

이 어이없는 굴욕적 협상을 반대하는 국민들을 상대로 총 칼로 진압에 나선 박정희 정권에서 한일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주역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오랜 지병 끝에 사망했다.

이날 사망한 김 전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굵은 획을 그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른바 3김 정치의 주역으로 기억되고 있다.

1926년 충남 부여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김 전 총리는 지난 1961년 5월 16일 사회 혼란과 장면 내각의 무능 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운 박정희 군부세력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2년이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을 시작으로 7, 8, 9, 10, 13, 14, 15, 16대 9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박정희 사망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국무총리에 이어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총재를 역임했다.

김 전 총리의 영결식은 오는 27일 수요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에서 진행되며 오전 9시 발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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