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포스트=김혜경 기자]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이자 명재상의 대명사 관중,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 인물의 이름을 나관중이 쓴 <삼국연의>에서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또 다른 명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은 자신을 관중에 비교하며 롤 모델로 삼곤 했죠. 사실 제갈량이 펼쳤던 정책들의 철학적 뿌리를 살펴보면 관중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관중은 중국철학의 간판스타 공자(孔子) 이전에 등장한 사상가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후세는 그의 정치사상을 한데 모아 ‘관자(管子)’라는 책으로 묶기도 했습니다. 제갈량조차 존경심을 표했던 관중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굴까요?


관중의 이름은 이오, 자는 중으로, 중국 춘추시대 제(濟)나라의 재상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제환공(齊桓公)을 보좌해 제후들의 맹주로 만든 것입니다.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관중도 재상 자리에 오르기까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는데요.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던 그에게 명문가 출신의 포숙아(鮑叔牙)라는 친구의 존재는 그 누구보다 소중했습니다. <사기>의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들이 정계에 몸담기 전 일들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 때쯤 제나라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관중은 공자 규(糾)를 포숙아는 훗날 제환공이 될 공자 소백(小白)을 보좌하게 됩니다. 문제는 누가 제나라의 지도자가 되느냐였고 그들은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죠. 관중은 소백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지만 결국 실패하고, 왕위 쟁탈전에서 패하게 됩니다.


포숙아는 제환공에게 “당신이 제나라만 통치할 것이라면 관중은 필요없지만 중원 전체를 평정할 생각이라면 관중은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조언합니다. 결국 제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시켰고 관중은 그만의 경제정책으로 제나라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을 물론, 제환공을 중원의 패자(?者)로 만듭니다. 이같은 배경에는 포숙아와 관중의 조언이라면 반드시 귀담아 들었던 제환공의 태도로 한 몫을 했죠.


관중의 업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지만 공자는 그를 ‘소인(小人)’ 즉 ‘그릇이 작은 인물’이라 평하곤 했습니다. 공자의 평가대로라면 그는 한낱 필부에 불과하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같은 평가의 배경에는 또 다른 숨은 뜻이 있는 것일까요?


공자도 관중의 업적에 대해서는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제환공의 패업은 모두 관중의 공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자가 관중에게 비판을 가한 이유는 바로 관중의 ‘사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재상이 된 이후 막대한 재산을 모았고 제 환공 못지않은 호화생활을 누렸습니다. 공자는 이같은 관중의 행동이 소인의 행동과 같다고 보고, 신하의 신분으로서는 도가 지나치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이들의 철학적 뿌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논어>에 기록된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학자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명확하게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사상적 핵심이 다르다는 것을 미뤄봤을 때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근본사상은 ‘인’과 ‘예’입니다. 각자의 신분에 맞는 행동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했죠. 반대로 관중의 사상은 ‘실용주의’에 가깝습니다. 관중은 “재물이 풍족해야 백성이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예절도 체면도 질서도 지킬 수 없다고 말한 것이죠.


<관자>에서는 경제정책들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제환공이 관중에게 한 지역의 백성들이 짚신을 삼고, 야채장사를 하면서 빈곤하게 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이에 관중은 ‘쌀 100석을 생산하는 농민은 짚신을 삼지 말고, 쌀 1000석을 생산하는 농민은 채소밭을 가지지 말고, 시장에서 900보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은 야채농사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짚신과 야채를 비싸게 팔 수 있으므로 기존 수입의 10배를 올릴 수 있다고 관중은 설명했습니다.


관중의 보호정책은 기득권층이 작은 사업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일종의 조정을 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국가가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해 일정한 규제를 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통상 유가는 상대적으로 국민 개개인을, 법가는 국가의 자체를 강조합니다. 관중의 사상은 이 두 가지를 자신의 방식대로 적절하게 조화시킨 셈입니다. 그러나 공자의 입장에서 관중의 물질우선주의는 소인의 태도로 비춰졌고, 관중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제나라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했지만 ‘질적으로는’ 부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교에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관중의 변절자적인 태도에도 공자의 제자들은 의문을 품었나 봅니다. <논어>에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은 “관중은 어진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자 규를 따라 죽기는커녕 제 환공을 돕기까지 했습니다”고 공자에게 묻습니다. 이에 공자는 “관중이 환공을 보좌해 맹주가 되게 하고 천하를 바로잡아 우리의 풍속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벌써 오랑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관중이 제환공을 보좌한 것은 마땅히 그래야 했던 일. 그러므로 관중이 인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고 답합니다.


관중을 소인이라 펌하했던 공자가 여기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공적이 크기 때문에 과오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만약 관중이 실패했다면 공자의 평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공자에 따르면 관중은 한편으로는 소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인을 추구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듯이 유교는 개인의 수양을 그 누구보다 중요시합니다. 공자가 재상으로서 관중과 한 개인으로서의 관중에 선을 긋고, 극과 극의 평가를 내리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한 중국매체에는 “공자를 중시하고 관자를 경시한 것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실수”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당대에 성공한 관중과 사후에 추앙을 받게 된 공자, 둘의 엇갈린 운명만큼 그들의 철학은 물과 기름과도 같습니다


<사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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