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스 미스터리 5천 개 구멍…잉카의 '초대형 장부'였나

2025-11-21     김정은 기자
몬테 시에르페 항공 사진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J.L. Bongers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페루 남부 안데스 산맥 피스코 계곡에는 길이 1.5km 구간에 약 5,200개의 구멍이 촘촘하게 띠 모양으로 이어진 '몬테 시에르페(Monte Sierpe)'가 자리한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지형 때문에 '밴드 오브 홀즈(Band of Holes)'로도 불리는 이 유적은 오랫동안 목적이 규명되지 않은 고고학적 난제로 남아 있었다.

최근 시드니대학교와 사우스플로리다대학교(USF)를 포함한 국제 공동 연구팀이 드론 매핑, 고해상도 지형 모델링, 퇴적물 분석을 종합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구조물의 용도에 대한 해석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연구팀은 몬테 시에르페가 단순한 의식 공간이나 기념물 차원을 넘어, 고대 교환 시장이자 물자를 기록하는 회계 공간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국제 고고학 학술지 '앤티퀴티(Antiquity)'에 실렸다.

◆ 반복되는 구멍 패턴…지형 전체가 하나의 '계수·분류 장치'

연구팀이 드론 촬영 자료를 정밀 분석한 결과, 구멍의 배열은 무작위적이라기보다 일정한 세그먼트 단위로 분절된 규칙적 패턴을 보였다. 일부 구간에서는 동일한 수의 구멍이 반복적으로 나타났고, 간격과 방향도 지형의 흐름을 따라 정교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몬테 시에르페 '구멍의 띠'와 그 주변 환경을 담은 항공 사진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J.L. Bongers

이 체계성은 잉카의 매듭 기록 장치 '키푸(quipu)'가 수행하던 기능을 지형 규모로 확장한 형태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키푸는 길이 2m 정도의 끈에 10~20개의 매듭이 이어진 구조로, 시장에서 물자의 재고와 종류를 관리하는 데 쓰였다. 몬테 시에르페에서도 구멍에 물품을 넣고 구멍의 수와 배치로 물자의 종류, 수량, 산출 지역 등을 기록·관리했을 것으로 연구팀은 추정하고 있다. 

피스코 인근에서 발견된 키푸. 현재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에 소장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Ethnologisches Museum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외계문명설 같은 비과학적 가설을 배제하고 행정·경제적 목적이라는 설명을 강화한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구멍 배열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조직 운영 방식을 반영하는 물리적 기록이라는 해석이다.

◆ 식물 잔해가 남긴 단서…교환·저장 활동의 거점

구멍 내부에서 확인된 옥수수 꽃가루와 바구니 제작에 쓰인 식물성 섬유는 이곳이 물품을 실제로 가져오고 분류·저장하던 장소였다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특히 바구니 섬유는 물자가 묶음 형태로 운송됐음을 보여주며, 몬테 시에르페가 일시적 보관·집적 공간으로 활용됐을 가능성과 맞닿는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J.L. Bongers

연구팀은 몬테 시에르페가 고대 친차(Chincha) 왕국의 경제 중심지였고, 이후 잉카가 지역을 통합하면서 시장과 회계 기능이 발전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번 연구를 이끈 시드니대학교 고고학자 제이컵 봉거스(Jacob Bongers) 박사는 "이 구멍들은 전잉카 시대 장터 역할을 했고, 이후 잉카 제국 시기에는 대규모 회계 시스템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항해 상인, 이동 상인, 농민과 어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옥수수와 면화 같은 물품을 교환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배열·퇴적물·지리적 맥락을 통해 기능이 새롭게 조명됐음에도, 왜 이러한 구조가 피스코 계곡에만 집중돼 있는지, 그리고 어떤 규칙과 제도로 운영됐는지는 여전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추가 시료 채취와 3D 지형 분석, 주변 고대 정착지와의 연계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