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을 전기차 충전기로…도심 인프라의 새로운 활용법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도심 거주자에게 전기차(EV) 충전은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다. 아파트나 다가구 주택처럼 개인 충전기를 설치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차를 세우고 곧바로 충전할 수 있는 접근성 자체가 부족하다.
이런 현실에 주목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연구팀은 기존 도로변 가로등을 전기차 충전소로 전환하는 실증 연구를 진행했다. 이 방식은 복잡한 도시 환경을 크게 바꾸지 않고도 충전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도시가 이미 갖춘 인프라를 재활용해 충전 접근성을 높이는 전략은 새로운 시설을 짓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여, 전기차 보급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충전 인프라 문제를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된다.
연구 결과는 도시계획 및 개발 분야 국제학술지 'Journal of Urban Planning and Development'에 게재됐다.
◆ 가로등을 충전소로 전환하는 실험…현장에서 확인된 효과
연구팀은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도심의 가로등 23곳에 충전 설비를 설치하고 약 1년간 운영 데이터를 수집했다. 공동 저자이자 토목환경공학 준교수인 시안비아오 후(Xianbiao Hu)는 "이 연구의 동기는 특히 도시·도심부에서 많은 아파트·다가구 거주자가 차고를 소유하지 않아 전용 가정용 EV 충전 스테이션을 이용할 수 없다는 현실에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젝트는 미국 에너지부 지원으로 진행됐으며, 연구팀은 캔자스시티 당국과 비영리단체 메트로 에너지 센터(Metro Energy Center), 현지 공익사업 회사, 국립 재생에너지 연구소(National Renewable Energy Laboratory)와 협력해 기존 가로등을 EV 충전 스테이션으로 개조했다. 이 같은 다기관 협력 구조는 단순한 기술 실험을 넘어 실제 도시 인프라에 적용 가능한 운영 모델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또한 설치 위치 선정에는 AI 기반 분석이 적극 활용됐다. 교통량, 주변 상업시설, 주차 가능성, 관심지점(POI)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해 충전 수요가 높은 지점을 예측한 것이다. 이는 설치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실제 이용도가 높은 지점을 찾는 데 핵심적인 단계였다.
논문의 필두 저자인 박사 연구원 위옌 판(Yuyan Pan)은 "가로등을 EV 충전에 활용하는 방식은 충전 인프라 확대와 지속가능한 전기 사용을 촉진하는 데 혁신적이면서도 공정한 접근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실험 결과는 예상보다 긍정적이었다. 가로등 충전기는 기존 충전소보다 설치비가 낮았고, 분산 설치 덕분에 충전 속도도 상대적으로 빠르게 나타났다. 도로변 주차 공간과 바로 연결되는 구조는 이용 편의성을 더욱 높였다.
기술 전문매체 테크브리프스(TechBriefs)는 이 연구가 "도심 거주자의 충전 격차를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한국 도심에서도 가능한가…남은 과제는
가로등 기반 충전 모델은 한국 도심 구조와도 상당히 닮아 있다. 연립·다가구 주택이 많은 지역이나 도로변 주차가 일상화된 구도심, 충전 인프라가 부족한 주택가는 이 방식의 활용 가능성이 높은 대표적 지역으로 꼽힌다.
물론 국내 적용에는 몇 가지 과제가 뒤따른다.
첫째, 가로등 전력망이 충전기 사양(예: 단상 240V)을 충족해야 한다.
둘째, 설치 지점이 실제 주차 가능 지역과 인접해야 한다.
셋째, 주정차 규정과 도로 점용 기준, 유지관리 체계 등 행정적 기반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인프라 재활용'이라는 접근은 도시 교통 인프라 문제를 완화할 강력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도심 곳곳에 이미 배치된 가로등망을 활용하면 설치비와 시간을 크게 절감할 수 있으며, 충전기를 위한 별도 부지를 확보할 필요도 없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연구팀 역시 이 방식이 "도시 규모나 구조가 달라도 확장 가능한 모델"임을 강조했다.
전기차 보급이 빠르게 확산되는 지금, 가로등 충전은 단순한 편의 개선을 넘어 도시 모빌리티 인프라 구조를 재설계하는 선택지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검토할 만한 현실적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