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남극의 쉐프'–고립된 시간 속에 머무는 한 끼의 온기

2025-11-17     김정은 기자
일본 영화 ‘남극의 쉐프’ 공식 스틸.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2009 Nankyoku Ryōrinin Film Partners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 2009년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영화 '남극의 쉐프'는 남극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다루지만, 그 공간을 과장하지 않는다.

영하 50도의 후지 기지에서 대원들의 하루를 유지하는 핵심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조리 담당 니시무라 준이 매일 준비하는 한 끼다. 제한된 재료 속에서 만들어지는 스테이크, 라멘, 얼음 디저트 같은 음식은 대원들의 흐트러진 균형을 잡아주며 영화의 분위기는 차분하게 쌓인다.

후지 기지에서 생활하는 여덟 명의 대원은 성격과 배경이 모두 다르다. 고립된 환경은 사소한 긴장과 감정의 흔들림을 만들고, 니시무라는 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한 끼를 준비하는 일은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대원들의 상태를 살피는 과정으로 작동하며, 반복되는 이 일상이 기지의 시간을 지탱한다.

◆ 음식이 만든 안정감과 관계의 흐름

'남극의 쉐프'에서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서 인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치로 그려진다. 주방에서의 움직임, 준비 과정을 기다리는 시간, 식탁에 마주 앉는 순간들이 영화의 리듬을 형성한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2009 Nankyoku Ryōrinin Film Partners

라멘 한 그릇을 완성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간수 문제로 라멘을 끓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니시무라는 여러 시도를 거쳐 한 그릇을 만들어낸다. 과장된 연출은 없지만, 이 과정은 대원들의 긴장을 완화하고 기지 내부 분위기를 부드럽게 정돈한다. 얼음 디저트나 생일 케이크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극한의 환경에서 작은 음식이 하루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큰 사건 없이 작은 변화를 천천히 쌓아가는 서사를 택한다. 남극이라는 공간이 가진 압박과 인물들 사이의 거리감을 과하지 않게 보여주며 작품 전체의 밀도를 높인다.

◆ 환경은 같아도 서사는 달라진다

최근 공개된 국내 예능 '남극의 셰프'는 같은 남극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한다. 다양한 음식 장면이 티저 영상에서 빠르게 지나가며 원작을 떠올렸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단순한 메뉴의 유사성 때문이라기보다, 남극을 바라보는 태도가 서서히 정서를 쌓아가는 방식보다 흥미 위주로 빠르게 소비되는 구성처럼 보였다는 의견도 나왔다.

MBC 새 예능 ‘남극의 셰프’ 티저 이미지와 출연진 모습.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MBC

이 프로그램은 당초 지난 4월 공개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편성이 조정됐다. MBC는 "정국 상황에 따른 일정 변경"이라고 설명했지만, 더본코리아 관련 논란이 이어지던 시기와 겹치며 여러 해석이 나온 바 있다. 다만 제작진은 "요리쇼가 아니다"라고 밝히며 환경 프로젝트로서의 취지를 강조했다.

같은 공간을 사용하더라도 서사를 다루는 태도에 따라 전달되는 감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최근 원작이 다시 언급되는 흐름 역시 이러한 차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남극이라는 극적인 공간은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남극의 쉐프'가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이유는, 거대한 볼거리보다 고립된 일상에서 작은 균형을 끌어올린 힘, 그리고 그 균형을 '한 끼의 정성'으로 지켜낸 서사적 깊이에 있다. 극지에서는 눈을 압도하는 장면보다 외로운 마음을 버티게 하는 느리고 단단한 정서가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