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금속', 생명과 전자의 경계를 허물다

2025-11-11     김정은 기자
세균 포자를 포함해 산화 문제를 줄인 '살아 있는 금속' 복합체의 나노 구조.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Advanced Functional Materials, 2025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끊어진 회로가 스스로 이어졌다. 미국 빙엄턴대학교(SUNY-Binghamton) 연구팀이 세균의 포자를 액체 금속에 융합해 스스로 회복하고 전류를 복원하는 신소재를 개발했다.

이 금속은 단순한 전도체가 아니다. 손상된 회로를 스스로 복구하고, 주변 환경에 따라 전기적 특성을 바꾸는 유연성을 지녔다.

연구팀은 이 물질을 '살아 있는 금속(living metal)'이라 부르며, 향후 인체 이식형 전자기기나 웨어러블 기기의 핵심 소재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번 성과는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펑셔널 머티리얼스(Advanced Functional Materials)'에 게재됐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Advanced Functional Materials, 2025

◆ 세균의 '휴면 포자'가 만든 자기 복구 금속

연구팀은 갈륨(Ga)과 인듐(In)을 섞은 상온 액체 금속(EGaIn)에 세균 '바실러스 서브틸리스(Bacillus subtilis)'의 포자를 섞었다.

포자는 세균이 극한 환경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형성하는 일종의 '휴면 캡슐'로, 건조나 고온, 약물에도 견디며 장기간 생존할 수 있다.

이 포자가 금속 내부에 들어가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보통 액체 금속은 공기나 물에 닿으면 표면에 산화막이 생겨 전자의 흐름이 막히지만, 포자의 표면 구조가 이 산화막을 분해하면서 금속 입자 사이를 다시 연결했다.

액체 금속만으로는 산화막 때문에 전류가 차단되지만, 세균 포자가 그 막을 분해해 회로를 다시 연결한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Advanced Functional Materials

그 결과, 절연된 회로가 스스로 이어지며 전류가 복구됐다. 연구팀은 일부러 미세 균열을 낸 복합체를 관찰한 결과, 몇 분에서 수십 분 사이에 금속이 스스로 흘러 들어가 손상이 복구되는 모습을 확인했다.

세균 포자가 액체 금속 입자와 결합해 전도 경로를 형성하는 모습을 전자현미경(SEM)으로 관찰한 결과.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Advanced Functional Materials

더 흥미로운 점은 포자가 ‘발아’해 활성화되면 스스로 전자를 생성하는 ‘전기생성 세균(electrogenic bacteria)’으로 바뀌어 전도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살아 있는 금속’은 일반 금속 수준의 전도성을 갖추면서도 자가 복구 능력을 가진 ‘움직이는 회로’로 진화했다.

◆ 생체와 전자를 잇는 새로운 연결

이 신소재의 가능성은 단순한 회로 복원에 그치지 않는다. 종이나 실리콘 수지 같은 유연한 기판 위에도 자유롭게 패턴을 형성할 수 있어, 비용을 낮추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전자 회로 제작이 가능하다.

또한 포자는 액체 금속 속에서도 20주 이상 생존하며, 원하는 시점에 발아를 유도해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살아 있는 금속'은 차세대 기술의 기반이 될 전망이다. 웨어러블 디바이스나 전자 피부처럼 반복적인 변형이 가해지는 기기에서 균열이 생겨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 인체 내에서도 장기간 안정성을 유지해 신경 인터페이스, 인공 장기 전극, 체내 센서 등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높다.

연구팀은 앞으로 포자의 발아 시점과 위치를 정밀하게 제어해, 생체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생명 기반 전자 시스템'을 구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