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그릇]⓵ 라면 한 그릇은 성역도...출신도 따지지 않는다

2025-11-10     송협 대표기자
©데일리포스트=라면 한 컷 이미지 생성 / AI

|데일리포스트=송협 대표기자|“라면 참 맛깔스럽게 드시네. 갑자기 나도 생각나는데, 한 그릇 끓여주소.”

퇴근길 들른 여의도 실내포차.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하루 이야기를 소주 잔에 담아 털어내며 한껏 들떠 있다. “꼼장어!” 외치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10평 남짓한 공간은 어린 시절 운동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호령하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한켠의 낡은 냉장고는 웅웅거리는 소음을 내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소리가 문득 운동회에서 엄마를 잃고 울먹이던 아이의 울음처럼 들린다.

낡고 시끄러운 공간이지만 나에게 이곳은 그 어떤 레스토랑보다 따뜻한 식탁이 된다. 익숙한 종업원은 내가 자리를 잡기 무섭게 라면 한 그릇과 잘 익은 김치를 내어놓는다.

「양은냄비의 마법」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 탱탱한 면발 위로 피어오르는 김. 그 위로 어슷하게 썰어 올려진 대파가 라면 스프 향과 어우러져 군침을 돋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한 숟가락 앞서간다.

벽면에는 빽빽이 붙어 있는 유명인들의 흔적이 눈에 띈다. 꼼장어, 오징어볶음, 낙지볶음, 돼지껍데기 같은 메뉴 사이에 “이모, 라면 맛 죽입니다!”라는 연예인의 흔적이 큼직하게 자리해 있다. 그 역시 수많은 메뉴 중 라면을 골랐나 보다.

맞은편에는 취기가 오른 넥타이 부대가 앉아 있다. 은테안경을 쓴 남자가 두 젊은 직장인에게 소주를 받으며 주절거리는데, 이야기는 이미 소음 속으로 묻힌 지 오래다. 그러던 그가 라면을 후루룩 먹는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외친다.

“이모, 여기 라면 한 그릇! 김치도 송송 썰어서!”

「라면을 대하는 작은 의식」

나는 라면을 먹을 때 나름의 의식이 있다. 먼저 젓가락으로 면발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고, 설익은 대파를 국물 속에 살짝 담근다. 그리고 면을 한 번 뒤집는다. 이는 국물 위의 면과 아래의 면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하는 오래된 습관이다.

이 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와인을 음미하듯 향을 느끼며 천천히 삼킨다. 아마도 은테안경에게는 그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평소 라면을 즐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옆자리의 젊은 직장인들도 의아해하며 묻는다.

“부장님, 라면 안 드시잖아요?”

그러나 그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생전 처음 먹는 음식인 양 라면을 쉬지 않고 흡입한다. 역시 라면의 힘은 대단하다.

「라면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라면의 매력은 단순히 맛에 있지 않다. 무엇보다 출신, 신분, 성역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이 크다. 라면만 있으면 누구나 한 자리에서 소박한 만족을 누릴 수 있다.

일상에서 라면을 입에 달고 사는 이도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라면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들마저 종종 라면 앞에서 솔직해진다. 한 대기업 총수는 한 매거진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이라 했다.

팍팍한 어린 시절을 견뎠던 한 정치인은 자신을 지탱해준 가장 든든한 친구가 라면이었다고 회상한다. 성공한 지금도 라면 사랑은 여전하다며 웃어 보였다고 한다.

라면은 그렇다. 서민에게는 생존이고, 성공한 이들에게는 추억이다. 누군가에게는 위로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흔적이다.

라면 한 그릇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마음과 마음을 잇는다. 그래서 나는 라면을 사랑한다.

내게 라면은 언제나, 가장 따뜻한 위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