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망 흔든 진동…유럽 대정전 부른 '대기 파동'이란?
급격한 기온 변화가 만든 공중의 흔들림, 전력 인프라를 뒤흔들다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2025년 4월 28일, 스페인과 포르투갈 일부 지역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신호등과 ATM이 일제히 멈췄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과 통신 두절로 연락이 끊긴 가족들이 불안 속에 밤을 지새웠다. 복구는 하루가 지난 29일에야 완료됐다.
전력망을 멈추게 한 원인은 단순한 고장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 전력회사 REN이 "대기 유도 진동(atmospheric induced vibration)"이라는 이례적 기상 현상을 지목했다. 하지만 이후 REN은 공식적으로 해당 설명을 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전을 계기로 과학자들과 전력 전문가들은 하나의 핵심 질문에 주목하게 됐다.
정말로 대기 흐름이 송전선을 흔들 수 있는가?
◆ '공기의 파동'이 전력망을 흔든다?
호주 멜버른대학교의 전력 시스템 전문가 세이에드 마후무디안(Seyed Mahmudian)은 "날씨는 전력망 장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며 "2000년부터 2021년까지 미국에서 발생한 정전의 83%가 기상 요인과 관련돼 있다"고 밝혔다.
폭풍, 열파, 산불, 사이클론 등 다양한 기상 요인이 송전선 손상이나 변전소 파괴를 일으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송전선에 가해지는 '진동'이 문제였다.
이러한 진동은 '이오리안 진동(aeolian vibration)' 또는 '미풍 진동' 등으로 구분된다. 고진폭·저주파수의 진동이나, 저진폭·고주파수의 진동이 바람, 기압 변화, 열 상승에 의해 발생하며, 장거리 송전선에 부담을 줄 수 있다.
※ 영상 속처럼 송전선이 바람과 기온 변화에 의해 휘어지는 현상은 극한 상황에서 전력망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진동을 막기 위해 송전선에 '스톡브리지 댐퍼(Stockbridge damper)'라는 진동 흡수 장치를 부착하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대기 파동은 기존 대비 설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 정전의 원인인가, 경고신호인가
대기 유도 진동은 아직 과학계에 정식으로 정의된 용어는 아니다. 다만, '급격한 기온 변화로 대기 중에 발생하는 파동이 송전선에 전달돼 물리적 흔들림을 유발하는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표면 일부가 열파로 빠르게 가열되면, 상공의 공기가 팽창해 상승하고, 주변 차가운 공기와의 압력 불균형으로 인해 대기 중에 잔물결처럼 파동이 형성된다. 이런 파동은 중력파(gravity wave), 음향-중력파(acoustic-gravity wave), 열 진동 등으로 불리며, 고전압 송전선과 같은 인프라에 실제 진동을 줄 수 있다.
전력 시스템 엔지니어 제레미 리처드슨(Jeremy Richardson)은 호주 학술매체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을 통해 "이러한 진동이 송전망 내 위상을 어긋나게 만들면 동기화 오류가 발생하고, 연쇄적인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REN이 철회한 설명 속에도 남은 교훈은 분명하다. 설사 대기 유도 진동이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더라도, 현대의 대규모 전력망이 이토록 민감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경고다.
◆ 기후 리스크 시대, 전력망도 재설계 필요
현대 전력망은 유럽처럼 국가를 넘나들며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구조는 효율성과 확장성 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하나의 장애가 연쇄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이번 사건은 "정전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보이지 않는 대기 흐름 하나가, 대륙의 불빛을 끌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후 변화가 초래할 수 있는 물리적 리스크를 전력 인프라 설계에 본격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중앙 집중형 전력망의 한계를 넘어, 지역 단위의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과 복원력 중심 설계가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