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학이 감정을 품을 때

2025-04-18     김정은 기자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저, 허블 출판사) 공식 표지

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SF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중심에는 기술보다 사람의 마음이 놓여 있다. 과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인간의 관계와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단편 모음집이다.

표제작은 상대성 이론 속 시간 차를 배경으로 가족을 기다리는 노인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빠르게 이동하는 우주선보다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이 더 오래 흘러간다는 설정은 물리학적 사실이지만, 작가는 이를 관계의 거리감으로 치환해 정서적으로 풀어낸다.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그곳에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다.

상대성 이론의 원리를 차용한 이 문장은 곧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단절을 동시에 상징한다. 작가는 '왜 기다리는가'보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이유'를 조명한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멀어짐'과 '붙잡음' 사이를 오간다. 우주, 기억, 타인, 기술 같은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그 배경은 어디까지나 감정의 흔들림을 위한 장치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은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끊임없이 연결을 시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연결이 결코 극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대한 사건이나 화려한 장치 없이 일상의 대화나 내면의 고민을 통해 관계의 실마리를 좇는다. SF라는 장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낯선 설정도 결국은 사람을 향해 작동한다.

또 다른 단편 「관내분실」은 죽은 이의 기억을 보관하는 도서관이라는 설정을 통해 흔적과 기억에 대한 집착, 상실 이후의 정서를 조용히 따라간다.

기억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흐릿해질 뿐이다.

이 문장은 작품의 정서를 가장 간결하게 보여준다. 복잡한 감정을 SF 설정이 아닌 일상의 감각으로 끌어오는 작가의 방식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관계가 멀어졌을 때의 불안,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조용한 기다림 같은 감정들이 차분하게 이어진다. 말보다 여운이 크다.

극적인 서사나 화려한 설정보다는, 일관된 시선으로 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여성 등 기존 이야기의 주변에 있던 이들을 조명한다. 이들을 강조하거나 부각하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자연스럽게 감정의 밀도를 느끼게 만든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분명 SF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다루는 주제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감정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감정과 선택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과학적 상상은 이야기의 토대일 뿐 그 위에 놓인 건 외로움, 망설임, 다정함 같은 보편적인 감정이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비록 닿을 수 없어도, 우리는 계속 연결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