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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전염병은 피부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는 증상과 높은 치사율 때문에 '흑사병(Black Death)'으로 불렸다. 흑사병은 창궐 3년 만에 중세 유럽 인구의 절반 수준인 4000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유럽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되고 있다. 

흑사병은 1346~1353년 유럽을 휩쓸었다. 문헌상으로는 1346년 크림반도의 마을 카파(Kaffa)를 포위하고 있던 몽골군에서 발생한 기록이 있으며, 이로 인해 코카서스 지방과 중앙아시아가 흑사병의 잠재적 발생원으로 여겨져 왔다. 이 외에도 흑사병 진원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등장했지만 지금까지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 규명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중세 유해를 이용한 조사를 통해 흑사병이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북부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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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고유전학자 요하네스 크라우제 박사와 영국 스털링대학 역사학자 필 슬라빈 박사 등이 참여한 국제 연구팀은 페스트균 유전자 분석을 바탕으로 중세 흑사병 발원지를 키르기스스탄 이식쿨(Issyk Kul) 호수 인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팀은 14세기(1338년과 1339년) 키르기스스탄 톈산산맥에 위치한 추 계곡에서 죽은 사람을 매장한 묘지가 118개 발굴되었고, 이 중 10개에 역병으로 죽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1880년대~1890년대에 발굴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송된 시신을 추적해 이 중 7구를 회수했다.

연구팀은 전염병이 명시된 묘비 가운데 유해 3구의 치아에서 페스트균 DNA를 검출해 분석을 진행했다. 그 결과 임파선페스트(선페스트)를 일으키는 페스트균(Y. pestis)을 검출하는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이 페스트균이 2011년 영국 런던에서 사망한 환자의 페스트균 샘플의 직계 조상이자 현재 페스트균 계통 대다수의 조상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키르기스스탄 발굴 무덤 묘비. 1338년 신자 산마크가 역병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데일리포스트=이미지 제공/A.S. Leybin(1886)

설치류는 '페스트균 자연 저장고' 역할을 하며 벼룩 등 매개 생물을 경유해 사람도 페스트균에 감염된다. 흑사병은 쥐를 통해 빠르게 확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키르기스스탄에서도 페스트균에 감염된 설치류와 사람 간 밀접 접촉으로 인한 유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라우제 박사는 "이 페스트균 계통과 가장 유사한 현대 변이종이 톈산산맥 주변 숙주동물에서 발견된다. 이는 중앙아시아가 중세 흑사병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톈산산맥은 고대 실크로드의 통과지다. 키르기스스탄 묘지에선 인도양 진주·지중해 산호·타국 동전 등이 발견됐다. 즉, 무역선을 통해 페스트균이 유럽·중동·북아프리카 등 서쪽으로 확산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팀은 추정하고 있다. 

한편, 중세사학자 모니카 그린 박사는 이번 연구에 대해 "흑사병의 조상인 페스트균에서 게놈(유전체)를 입수한 것은 엄청나게 비약적인 진보"라고 평가하고, "묘비는 사망증명서에 매우 가까운 것으로 이 페스트균 계통이 당시부터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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