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일리포스트 이미지 출처=unsplash

[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펼쳐진 1차 세계대전은 무려 1600만 명의 희생자를 기록한 끔찍한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1918년 세계는 일명 '스페인독감'이 휘몰아쳐 수천만 명이 사망했다. 

스페인이 바이러스 창궐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 언론이 유알하게  참상을 숨김없이 전했기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배경에 '100년에 한 번 오는 기상이변'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논문은 미국 지구 물리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지오헬스(geoHealth)'에 게재됐다. 

ⓒ 데일리포스트 이미지 출처=geoHealth

1차 세계대전은 대치가 오랫동안 계속되며 참호가 갈수록 길어졌고 참호 속에서 강우에 의한 웅덩이와 진흙 속에 장시간 노출된 군인들은 기온이 떨어지면 극심한 체온 저하와 동상에 시달렸다. 

트렌치(Trench)는 '참호'를 뜻하는 단어로, 서부 전선에 참호가 대규모로 사용되면서 '트렌치 전쟁이'라는 말이 곧 제1차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트렌치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반면, 당시 유럽을 덮친 기상 조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깊이 연구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의 실제 모습 ⓒ 데일리포스트 이미지 출처=Wikimedia

이에 하버드대 알렉산더 모어 박사 연구팀은 알프스산맥에서 채취한 빙하 코어(glacier core:극지방 빙하에서 채취한 원통 모양의 얼음 기둥) 데이터를 통해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기상 조건을 재구성했다.

연구팀이 빙하 코어 속 해수 염분 등을 분석한 결과, 1915년·1916년·1918년 겨울에는 대서양의 공기가 다량으로 유럽에 흘러들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유례없는 이상한 공기의 흐름 속에 유럽은 강우량이 급증하고 매서운 추위가 이어졌다. 

모어 박사는 "대기 순환의 변화로 유럽 전역에서 6년간 예년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리면서 추운 기후가 이어졌다. 이러한 기상이변은 100년에 한 번 있을 정도의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이상 기후로 인한 강우량 증가와 맹렬한 추위가 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에 영향을 미쳤다고 연구팀은 주장한다.  

ⓒ 데일리포스트 이미지 출처=pixabay

또 연구팀은 기상이변이 1918년 대유행을 일으켰던 스페인독감의 발생 요인 중 하나였을 가능성도 지적했다. 스페인독감은 조류독감의 일종이다. '인플루엔자 A형 H1N1 아형(subtype)' 병원체의 주요 숙주인 청둥오리의 이동 패턴은 기후 변화에 매우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8년 청둥오리들은 예년과 달리 러시아 방면으로 이동하지 않고, 서유럽에 계속 머물렀다고 연구팀은 지적했다. 전시 속에서 비위생적인 환경에 놓인 군인과 민간인이 상대적으로 청둥오리와 접촉하기 쉬운 상황이 이어졌고, 그 결과 청둥오리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파돼 치사율 높은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으로 번졌다는 설명이다. 

필립 랜드리건(Philip Landrigan) 보스턴대 교수는 과학저널 AGU Newsroom 취재에 "막대한 비가 바이러스 확산을 가속시켰다는 하버드대 연구팀의 추정은 매우 흥미롭다"며 "감염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자 신뢰할 수 있는 연구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