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포스트=김혜경 기자] ‘땅콩회항’ 사건으로 지난해 12월 구속기소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143일만에 풀려났다.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판사 김상환)는 22일 항공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조현아 전 부사장에 대해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뒤집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날 법정 앞에는 몰려든 취재진들과 방청객들로 아침 일찍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100명 이상 수용 가능한 대법정은 조 전 부사장 공판 시간이 되자 한 자리도 남기지 않고 꽉꽉 찼다. 기자석과 일반 방청객석을 구분해 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일대 혼전이 빚어지기도 했다.


오전 9시 55분께 연한 녹색 수의를 입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조 전 부사장이 법정에 모습을 보였다. 그는 변호인 측에 나란히 앉으려다 법원 직원의 안내를 받고 재판석 정면에 있는 증인석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채 재판부의 판결을 듣던 조 전 부사장은 몇 분 간격으로 몸을 뒤척이면서 조금은 산만한 모습도 보였다.


조 전 부사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항공기 항로변경죄(항공보안법 42조 위반)를 비롯해 항공기 안전운항 저해 폭행(항공보안법 46조, 23조 2항 위반), 강요(형법 324조 위반)·업무방해죄(형법 314조 1항 위반), 위계공무집행방해죄(형법 137조 위반) 총 4가지다.


항소심에서 조 전 부사장이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항공보안법상 항공기 항로변경죄’가 1심과는 다르게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항로변경죄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은 1심에서부터 날선 공방을 벌여왔다.


특히 비행기 회항이 이뤄진 장소인 ‘항로’의 구체적인 개념과 범위가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이 됐다. 법에는 항로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명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용어 정의를 둘러싸고 논쟁이 오갔다.


앞서 1심 재판부(부장판사 오성우)는 “항공보안법상 ‘항로’는 공로뿐만 아니라 운항 중인 비행기가 이륙 전과 착륙 후 지상에서 이동하는 상태까지 포함한다고 해석해야 한다”며 이 부분을 유죄로 판단했다.


당시 재판부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린 사건”이라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심이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라며 조 전 부사장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계류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에 초점을 맞췄다. 계류장이란 토잉카의 견인에 의해 항공기가 이동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계류장의 뚜렷한 특수성은 항공보안법상 항로의 한 부분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본 재판부의 설명이다.


재판부는 “항공보안법상 ‘항로’에는 회항이 이뤄진 계류장 내 이동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계류장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이동이 허용되기 때문에 이 사건에 일어난 ‘지상 이동’을 항로변경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시했다.


이어 “입법자는 그 범죄가 이뤄지는 상황이나 장소가 ‘운항 중’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것일뿐 입법자가 어떠한 행위를 범죄의 핵심 구성 요건으로 삼았는지는 법 문항의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고 덧붙였다.


또 재판부는 조 전 부사장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양형 참작 사유로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자신의 행위가 중하다고 당초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구치소의 생활을 통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며 “쌍둥이 자녀를 둔 어머니라는 점, 부사장의 지위에서 물러났다는 점, 그리고 이같은 사회의 낙인을 늘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미뤄봤을 때 피고인의 처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날 주문에 앞서 이 같은 판결을 내리게 된 배경에 대해 각종 문헌과 국제협약 등을 거론하며 약 1시간 동안 설명을 이어갔다.


오전 11시께 항소심 재판이 끝나자 조 전 부사장은 서둘러 법정을 빠져나갔다. 이와 동시에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 방청객이?“조현아, 착하게 살아라”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재판이 종료되고도 취재 열기는 식지 않았다. 조 전 부사장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은 법원 주차장과 로비 등 곳곳에서 서성거렸다.


조 전 부사장 측 법률대리인은 재판이 끝난 직후 취재진에게 “이 사건으로 상처를 받은 모든 분들께 피고인을 대신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며 “현재로서는 향후 아무것도 계획된 것이 없기 때문에 우선 판결문부터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11시 40분께 조 전 부사장이 법원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선고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했는 듯 법정에서 입었던 녹색 수의 대신 준비해온 검은색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취재진이 질문 공세를 쏟아내자 조 전 부사장은 황급히 대기하던 차에 올라타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이번 항소심 결과에 대해 “비행기는 고도의 안전이 필요한 공간인데 계류장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사건은 비행기의 진행을 방해한 것”이라며 “물론 법률적 논쟁 부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항공전문가들이 위험한 행위라고 말한 것처럼 현실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처장은 “집행유예 선고는 항소심 재판부가 이런 재벌의 갑질 범죄, 나아가 시민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범죄 행위에 대해서 조금은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이번 사건은 사회에서 슈퍼갑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조 전 부사장은 검찰이 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할 경우 불구속 상태로 상고심을 받게 될 예정이다.


(사진=재판이 끝난 후 조현아 전 부사장 측 변호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취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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