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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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ina Focus]⑪ 현대 중국과 법가(法家)…염철론과 ‘왕도=패도’의 공식

[China Focus]⑪ 현대 중국과 법가(法家)…염철론과 ‘왕도=패도’의 공식

[데일리포스트=김혜경기자] 기원전 82년 한 소제는 자신의 명의로 국가 경영 전략회의를 소집한다. 회의 주제는 무제 때 시작된 소금·철·술 전매정책이 과연 옳은가를 따져보자는 것. 오늘날 총리급에 해당되는 상앙, 어사대부 등 중앙관료와 현량, 문학으로 대표되는 지방 유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벌인 대토론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매정책을 지지한 중앙 측과 폐지가 마땅하다는 유생·지식인의 대립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상과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의제로 확대된다. 토론 현장을 기록한 ‘염철론’을 살펴보면 중앙관료는 법가를, 지방 지식인은 유가를 대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대목을 발췌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대부가 말했다.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같은 형벌로 처벌한 것은 범죄자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사악한 생각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중략) 가벼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무겁게 판결하고 철저하게 규명하는 까닭은 원인이 있다. 법률의 미묘한 점은 본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 말했다. 도덕이 명확하면 사람들이 따르기 쉽고 법률이 간략하면 사람들이 실행하기 쉽다. 지금 천자가 다니는 길은 구릉의 평지까지 통하고 천하에 펼쳐져 있는데 이 때문에 만 리가 백성의 함정이 되었다. 산과 계곡에는 그물이 넓게 쳐져 있고, 길마다 함정이 은폐되어 있으며 화살이 머리 위로 날아가니 백성이 재앙을 만나지 않을 수 있겠나?”

염철 국영 전매는 흉노 정벌로 바닥난 국가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였지만 지방 호족에 대한 중앙지배계급의 복수라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

당시 호족들이 각 지역에서 행패를 부려도 조정 관리들이 제어할 수 없었고, 호족이 운영하는 장원에 일반 백성들이 흡수되자 통치에 있어 공백이 생기게 된다. 호족들 부의 근원인 소금과 철, 술 판매권을 국가가 회수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호족탄압정책은 오히려 국가권력의 존립 기반인 일반 백성의 생활을 파탄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국가의 입맛대로 소금과 철의 가치가 책정되는 탓에 가격 폭등은 필연적이었다. 생필품조차 구매가 불가능한 백성들은 국가의 착취를 견디거나 호족에게로 흡수되거나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같은 사회 환경으로 염철회의를 비춰보면 중앙지배계급과 지방호족의 대립으로 해석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중앙관료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유생들의 논리에는 호족 세력에 대한 지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들도 호족의 온실 속에서 성장한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시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호족 배후에는 무제 때부터 병권을 틀어진 곽광 장군이 있었고, 염철회의를 끝으로 상관걸, 상홍양 등 중앙 세력은 곽광 세력에게 제거당한다.

염철론을 무제시대 연장이냐 혹은 전 시대로 회귀하느냐의 대립으로 보기도 한다. 정치적 역학관계로 법가 통치술을 대표하던 세력들이 제거됐지만 정신만은 살아남아 유가와의 융합을 이룬다. 이른바 패도와 왕도의 결합으로 ‘제3의 이데올로기’ 혹은 한나라식 교학이 탄생한다. 관영산업이었던 소금·철·술 중 결국 주류 전매만 폐지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나라의 정치·학술 세계가 유가로 포장되기 시작하면서 국가권력, 법가 사상과의 공존을 위한 이론 수정도 이뤄진다. 소제 다음으로 즉위한 선제는 법치주의를 숭상했다. 이 시기 이뤄진 ‘석거각 논의’는 ‘공양학’과 ‘곡량학’의 우열을 가리는 토론으로, 유교 내부의 대립을 국가적 규모에서 조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양학은 가족도덕과 국가규범은 동일하다는 전통적인 유가 사상이지만 곡량학의 경우, 가족도덕으로부터 국가규범을 분리한다. 이는 ‘적법’과 ‘도덕’은 같지 않다는 뜻이며, 도덕을 법에 종속시키므로 오히려 법가 사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해당 토론에서는 군주 취향의 반영으로 곡량학 이론이 채용됐다.

앞서 군주 권력 제한을 목적으로 동중서가 제시한 ‘재이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예언의 성격이 강해졌는데 전한 말기 ‘도참’의 모습으로 출현하게 된다.

후한에서 도참은 왕조권위의 신성화라는 정치적 의도 아래 널리 보급된다. 단순 역사서인 ‘춘추’를 예언서로 둔갑시키기도 했는데 공자가 ‘춘추’에 주나라를 계승할 정통왕조로 한나라의 도래를 예견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본래 유가는 인간과 하늘을 분리시켰지만 인간과 하늘을 연계시킨 논리로 변했고, 음양설까지 흡수한다. 유가에서는 덕과 형벌을 대립 관계에 뒀지만 한 대에는 음양 사상을 이용해 덕을 양에, 형벌을 음에 배치해 양자를 모두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후한 시기에 들어서면서 유학은 국가학문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종교화까지 감행한다.

유가 사상이 스스로 이론의 왜곡을 감행한 것은 국가 권력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가 유교를 통치 규범으로 내세운 것은 권력 사용의 절약과 효율을 위해서였다. 관념화된 유학은 현실 세계와의 괴리를 보였고, 학문의 생존을 위해 국가 권력에 더욱더 집착하는 모순을 낳았다.

통일 왕조의 질서를 유지할 강력한 국가주의와 덕치의 공존 문제는 2000여년간 통치자가 풀어야 할 숙제였고, 한 왕조는 어느정도 실마리를 제공한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이 일당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할 수단으로 ‘중국적 가치’를 들먹이는 것도 자국 역사에서 학습한 결과로 풀이된다. 중국식 법치라는 통치술에 유가식 계몽을 접목시킨 결과 창당 100년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사상전문가 히하라 도시쿠니는 자신의 저서 ‘국가와 백성 사이의 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의 독이빨이 ‘유술 또는 유가의 옛 의리’로 치장됨으로서 지배 의지의 강제적 집행이 곧 유교적 당위의 실천이라는 형태로 원활하게 수행돼왔다. 유교가 국교로 포장돼 그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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