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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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Focus]⑩ 현대 중국과 법가(法家)…유학은 국가 권력의 장식품?

[데일리포스트=김혜경기자] 중국 고전 인용을 즐기는 시진핑 주석의 수사(레토릭)를 분석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논어>로 대표되는 유가와 <상군서> 등 법가의 간판문헌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그 예다. 부정부패정책 선전을 위해서는 “호랑이든 파리든 다 때려잡아야 한다”라는 엄격한 수사를 사용하는 반면 중국인들의 꿈을 북돋고 대국의 풍모를 보여줘야 할 때는 덕스러운 문장을 인용한다. 법치와 덕치의 융합은 비단 레토릭에 국한 되지 않는다.

2014년 10월 제18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 결정문에서 시 주석은 “법에 따른 통치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법치와 덕을 이용한 국가 통치의 결합을 지지한다”라고 언급했다.

법가와 유가, 상이한 성격의 두 사상을 결합해 통치에 적용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법치라는 목표를 위해’ 덕치를 이용한다는 행간 사이의 의미를 읽으면 중국 공산당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漢)대부터 청(淸)대까지의 통치 이념은 유가라고 알려져 있다. 전제왕권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위해 권력의 맨 얼굴을 포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해진 사회를 좀 더 ‘유연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투박한 방식의 통치술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직시한 것.

유학을 종교화시켜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통치 권력 제어를 중요시하는 유가의 기본 원리까지 왜곡시키면서 국가에 종속시키는 등 ‘국가중심주의’로 표방되는 법가의 그림자가 짙은 이유는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 고대왕조 한나라에서 어떻게 왕도와 패도가 한 몸이 됐는지 2편에 걸쳐서 알아보려고 한다.

기원전 202년 한 고조 유방은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꺾고 중국 대륙을 재통일했다. 중앙집권을 통해 왕권을 강화할 필요에 있었음에도 초기 한 왕조는 국가의 행위를 극도로 절제했다.

법가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던 진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초한쟁패시기 유방이 선포한 “살인은 사형, 상해와 도둑질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는 ‘약법삼장’도 그 궤를 같이 한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미뤄봤을 때 유방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약법삼장은 진나라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고, 이후 약 60여년간 도가의 한 분파인 황로사상이 황실과 공신들 사이에서 신봉됐다.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는 ‘무위이치(無爲而治)’는 이 시기의 통치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141년 즉위한 한 무제는 이같은 체제를 뒤집는다. 야심만만했던 15살의 젊은 황제는 과거 통일 진나라와 유사한 제국 건설을 꿈꿨고, 강력한 법치와 중앙집권을 표방하고 나선다.

비슷한 시기 동중서라는 유학자는 ‘현량대책’이라는 의견서를 무제에게 올리면서 유교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조언한다. 생각해보건대 다음과 같은 동중서의 의견이 무제를 흡족하게 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 한 무제. 사진=위키백과 제공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기로는 육예의 학과와 공자의 학술에 속하지 않는 여러 학술은 그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세상에 출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악하고 편벽된 학술이 사라질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통치와 기강이 하나가 되고 법도가 명확해져 백성들이 무엇을 따라야 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유학 이외 다른 제자백가의 씨를 말려버림으로써 사상적 통일을 이뤄내자는 주장이다. 이상적인 유교 국가의 출현을 위해 유가의 기본 원리인 ‘덕치’를 어겨도 된다는 것인가?

묘하게 진나라에서 벌어진 분서갱유와 현대 중국 공산당의 사상 자유에 대한 탄압과 닮아있다. 한편 동중서는 군주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이론도 별도로 제시한 바 있는데 이는 다음 편에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무제가 동중서의 의견을 채용해 명분상으로 유학을 관학으로 만든 데에는 춘추전국시대와는 다르게 통일 국가의 비대해진 영토와 농경산업의 발달도 한몫했을 것이다.

당시 산업을 이끈 최소 단위는 가족으로, 이들 간 단결이 곧 산업 경쟁력이었다. 아이는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장유유서를 도덕적 절대 가치로 정착시킨다면 가족 간 갈등을 사전에 봉합시킬 수 있다.

장유유서를 확대하면 군신관계 정립으로, 나아가 사회 전체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유가적 사고 양식은 위로는 고위 관리에서부터 아래로는 민중에까지 그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유교적인 사고 양식에 기초해 모종의 권위가 형성되는 것. 통치자 입장에서도 이같은 유가적 사상체계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일본의 사상전문가 히하라 도시쿠니는 저서 ‘국가와 백성 사이의 한’에서 “한대의 향당사회는 (중략) 유교적인 사고 양식에 근거한 권위가 형성됐고, (중략) 국가권력이 이러한 유교주의적 권위를 승인하는 논리를 그대로 수평으로 옮겨 절대주의적인 권위의 승인으로 환치시킨 것은 국가권력 전체의 에너지를 높이는 노련하고 동시에 현명한 방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무제 때 유학이 처음으로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법가 통치술이 사회를 통제했다. 혹자는 전한시대 통틀어 가장 독한 법치가 성행했다고 평하며 무제를 진시황에 빗대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는 무제 때의 혹리(가혹한 통치를 일삼는 관료)로 인해 벌어진 수많은 주살이 기록돼있다.

제국건설을 꿈꾼 무제는 6차례에 걸친 흉노 정벌과 서역의 중국화, 위만조선 침략 등 외정에 막대한 국력을 소모한다. 바닥난 국고를 채울 수단으로 민간에 이양됐던 소금·철·술 전매를 국가가 도맡음으로써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는 통치술 재정비로 나아간다.

기원전 82년, 무제 사후 벌어진 ‘염철회의’는 유교국교화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다. 법술통치 대변자인 중앙관료와 유학을 선봉하는 지방유생·지식인이 소금·철·술 전매정책을 두고 대격돌을 벌인다. 염철회의를 기점으로 국가 권력은 좀 더 세련된 형태로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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