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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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Focus]⑩ 현대 중국과 법가(法家)…상앙의 법률관 ‘국가지상주의’ 中

[데일리포스트=김혜경기자] ‘의법치국’과 ‘시따따(시진핑아저씨)’, ‘중국몽’은 시진핑 체제 하 중국 공산당의 핵심 통치 도구다. 전자는 채찍이요, 후자의 두 가지는 당근 격이다. 이미지로 묘사해보자면 “우리 민족의 꿈을 위해 단결합시다”라고 외치는 푸근한 얼굴의 아저씨가 등 뒤로는 서슬 퍼런 칼날을 쥐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장기간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정당성이, 정당성 부여를 위해서는 ‘외적 권위’가 필요하다. 엄격한 이미지를 지닌 권력의 민낯을 가리고, 인자한 모습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다. 물리적인 압제를 통한 강제적 복종보다 ‘동의에 의한’ 복종이 통치 권력을 운용함에 있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중국 사상사에서 덕치주의와 법치(국가)주의, 혹은 왕도와 패도. 이 둘의 간극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본래 병가(兵家)에 대한 대안으로 공자 사상이 출현했지만 그 후 유학과 오랫동안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인 학파는 상앙과 신불해, 한비자 등으로 대표되는 법가다.

통일제국 진(秦)나라의 국가 이론으로 법가가 채택되면서 우세한 듯 보였지만 한(漢)나라 등장 후 그 존재감이 위축된다.

진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건국 후 약 60년간 국가의 행위를 극도로 절제한 한나라가 강력한 법술통치를 표방하고 나선 것은 한 무제 때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유학(儒學)도 본격 중앙정치에 등장하게 되고 ‘염철회의’를 시작으로 100여년에 걸쳐 유가와 법가의 공모가 서서히 이뤄진다.

유학은 ‘유교’라는 이름으로 종교화되고, 국가 권력의 본 모습을 가리는 외적 권위이자 왕권 신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한나라를 비롯해 역대 중국 왕조가 벤치마킹한 통치체제는 진나라 통일의 초석이 된 상앙(商鞅)의 법률관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앙의 저서라고 알려진 ‘상군서’에는 법을 통치술로 숭상시켜 현실정치에 적용한 전제왕권 통치철학의 노하우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후대 한나라에 이르러서야 ‘법가’의 이름으로 분류됐지만 전국시대 당시 법가는 3가지 분파로 나눠져 있었다. 신불해(申不害)는 신하를 다스리는 군주의 권모술수를 강조하며 ‘술(術)’을 중시했고, 신도(慎到)는 군주가 위세가 있어야만 신하를 부릴 수 있다는 ‘세(勢)’를 통치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마지막으로 상앙의 경우 ‘법(法)’ 중시한 부류였으며 한비(韓非)는 선배격인 상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되 술과 세, 법을 통합시켜 ‘한비자’로 집대성했다.

▲ 사진=위키백과

진나라 ‘상앙변법’의 상징성 때문에 다른 제후국은 어떠한 개혁도 없이 앉아서 망국의 운명을 맞은 것 같지만 사회 환경의 변화로 인해 변법 시행은 필수였다.

변법을 가장 먼저 실시한 곳은 위나라의 이회(李悝)였고, 한(韓)나라의 경우 신불해를 재상으로 등용했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가 통일제국을 수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앙식 개혁이 단기간 국력 신장에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상앙변법의 핵심은 국가와 백성 사이 직접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성규 교수의 저서 ‘중국고대제국성립사 연구’에 따르면 춘추시대 말기부터 ‘도(盜)’라는 공권력 지배 외의 존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동체에서 이탈한 농민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정도였는데 귀족에게 몸을 의탁하거나 토지를 개간해 만든 ‘신취락’에 정착하는 것이었다.

신취락 점유에 대한 귀족들의 요구가 높아지자 춘추시대 공실들은 이를 몰수해 귀족에게 분배했고, 이들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도의 출현이 잦아졌다는 뜻은 통치권력의 공백 범위가 확장됐다는 의미다.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소농민의 이탈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토지분배정책이 대두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토지국유제에 입각한 수전제도’가 상앙변볍의 핵심이었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이같은 토지제도는 진나라 지배체제의 기초가 됐고, 국가와 백성의 직접적인 지배 관계가 설정되면서 중앙집권제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이 된다. 농민에게 노동여건을 보장하면서 빈곤화를 방지하고 각종 의무 부과를 통해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이는 빈부 갈등을 완화하고 계층갈등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경죄중벌’도 핵심이다. 가벼운 죄도 엄격하게 처벌해 무거운 죄를 예방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뜻으로 연좌제가 대표적 예다.

이같은 논리는 후대 한나라 때 표면적으로 드러난 범죄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 이전의 불순한 의지를 살펴 엄벌한다는 국가주의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국가 권력의 무제한적 남용이 가능해지는 것. 이는 오늘날 중국 정부가 벌이고 있는 언론자유 탄압과 유사하다.

우민(愚民)과 약민(弱民) 정책도 상앙의 작품이다. 상앙은 “백성이 나약하면 법을 준수하고, 방탕하면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백성들이 나약하면 쓸모가 있고, 백성들이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나워져서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귀족세력 약화를 위해 백성의 절대적 빈곤을 해소할 필요는 있지만 국가와 군주 권력에 해가 될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정당성 유지를 위해 자국의 전통 유산을 착실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하나의 중국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주의가 필요하다.

당은 법을 초월하는 존재로, 당을 관리·감독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당 자신뿐이다. 부국강병과 전제권력 강화, 큰 국가를 지향했던 고대 법가 사상의 그림자가 현대 중국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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