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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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재해석]①西歐의 대륙교(大陸敎)가 된 가톨릭…원인은 역성혁명

[역사의 재해석]①西歐의 대륙교(大陸敎)가 된 가톨릭…원인은 역성혁명

[데일리포스트=이상훈 자유기고가] 역성혁명.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아닌 자가 쿠데타로 선 왕조를 뒤엎고 왕위 또는 황제위를 뺏는 걸 말한다. 역성혁명은 중국에선 굉장히 흔한 일이다. 우리나라도 한번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하고 조선을 세운 것 말이다.

역성혁명의 논리는 뭘까? 동양적 사고에서 역성혁명의 논리는 전국시대 유학(儒學)자인 맹자가 내세운 천심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심은 뭔가? 맹자의 사상적 스승인 공자는 말했다.

民心은 天心이라고. 즉 민심을 얻은 자가 천심을 가진 자라는 공식이 탄생한다. 하지만… 공자는 또 말했다. 민은 草라고. 민심은 풀잎처럼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다는 게 공자의 말씀이다.

결국 엄청난 실력을 바탕으로 민심을 얻어 천심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권력은 조만간 다른 실력자에게 민심 즉 천심을 뺏기고 몰락하게 된다. 이 것이 역성혁명의 함정이다. 민심. 즉 지지도. 현 정권의 지지도는 88%다. 가히 천심을 가진 정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동양에 비해 물질 중심적이라는 유럽에는 역성혁명이 있었을까? 거의 없다.. 거의 없다라고 말한 것은 단 한번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왕조가 탄생했다 사라진 유럽에서 역성혁명이 단 한번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라, 고려, 조선 단 3개통일 왕조가 있었던 우리나라에서도 한번 역성혁명이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문화를 배워갔다고 우월감을 갖고 있는 일본에서도 역성혁명은 단 한차례도 없다.

그럼 다시 유럽으로 들어가서.. 유럽에서 있었던 단 한차례의 역성혁명. 그것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왔다. 전 유럽인구의 55%가 믿고 있는 사실상 국교, 아니 대륙교(大陸敎)인 가톨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은 종교의 자유를 許하는 밀라노칙령(313)에 이어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통일 기독교 종파가 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가톨릭은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에서만 인기를 끌고 있었을 뿐 세계 종교는 아니었다. 오히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아리우스파가 더 교세가 컸다.

가톨릭의 핵심교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초기 가톨릭 사제들이 한 적은 없다.

매우 복잡한 이론인데 간단히 말하면 예수가 곧 신격(神格)이라는 것. 예수가 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첫째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과 둘째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인 것이나 예수가 부할한 것은 본 사람이 없다. 그냥 12사도의 주장일 뿐이다. 일견 황당한 수령님이 가랑잎으로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과 같은 주장임을 감안하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예수가 신은 아니지만 한없이 신에 가까운 인간이라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더 먹혀 든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결국 승리한 것은 가톨릭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서로마가 멸망한 뒤 유럽의 새 주인이 된 야만족! 중국인들이 자신들 빼고는 다 오랑캐라 한 것처럼… 게르만인들이 가톨릭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 로마는 이미 가톨릭의 나라였다. 하지만 로마를 점령한 게르만족들은 모두 아리우스파였다.

특히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를 점령한 반달족 Vandals 반달곰이 아니다. 서고트족, 동고트족은 모두 아리우스파였다. 다만 가톨릭이 아리우스파에 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

어쩌면 가톨릭이 세계 종교가 된 이유는 이교나 이단에 대한 박해 때문일지도…물론 이는 소수 지배층인 아리우스파가 다수 피지배층인 가톨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지금의 프랑스 땅인 갈리아에는 프랑크족의 나라인 프랑크왕국이 들어선다. 그 넓은 갈리아를 석권한 프랑크 족은 매우 강대했다.

그리고 통일 프랑크왕국을 세운 메로빙거 왕조의 국왕 클로비스1세는 다른 게르만족과 달리 가톨릭 신자였던 것이다. 야만족과 동로마 황제에 시달리는 로마 교황이 만세를 불렀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클로비스1세를 비롯한 메로빙거 국왕들은 도무지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오딘, 토르, 프레이야를 믿던 게르만 전통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았고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신봉은 하지만 정교(政敎)일치 국가를 만들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강대한 세력으로 커가는 교회를 박해해 땅과 재산을 빼앗는, 로마교황에겐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8세기에 들어 메로빙거 왕조에 망조가 든다. 메로빙거 왕조에 든 망조는 바로 이들 게르만들이 채택하고 있는 ‘살리카법’ 때문이다. 살리카법에 따라 왕의 아들들은 모두 균등한 상속권을 갖는다.

이는 통일 왕국을 쪼개는 원인이 됐고 아들들은 부왕이 죽은 뒤 다른 형제의 땅을 빼앗겠다고 전쟁을 하게 된다. 그중 빨리 죽은 왕이 있으면 어린 왕이 즉위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왕의 비서였던 궁재(宮宰)의 권한이 강해진다.

이 과정에서 7세기부터 성장한 궁재 전담가문인 카롤링거집안–이때는 카롤링거라는 명칭은 없었다8세기 들어 카를마르텔이란 걸출한 얼자(孼子)가 탄생했는데 이 얼자는 적자와 적모를 상대로 전쟁을 해 왕국 내 모든 분국의 궁재에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망치(마르텔)라는 별명과 부합하게 모든 적들을 다 때려잡았는데. 이 양반이 가톨릭교회에 눈을 돌린 것이다!

카를마르텔은 동네 백수 신분에서 군대 1000명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왕국의 모든 권세를 가졌던 적모와 적자를 축출했을 정도로 실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얼자라는 신분상 정통성은 없었기 때문에 종교와 친해지려 했다. 그래도 카를마르텔은 빈손으로 출발해 궁재 자리에 오른 자부심이 있었던지 교회와 무한대로 친해지려 하지는 않았다. 궁재라는 자리가 대단하긴 하지만 왕은 아니었고 원칙상 능력만 있으면 오를 수 있는 자리기 때문에 혈통이 굳이 필요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를마르텔의 뒤를 이은 아들 피핀(불어: 페팽)이 피핀3세로서 궁재에 오른 후 상황이 묘하게 변한다. 피핀은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동양에도 이런 역사는 종종 있다. 주문왕 대신 아들 주무왕이, 위태조 조조 대신 아들 조비가 각각 군주가 된 것처럼…

왕이 되고 싶었던 피핀이 비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인 교황이다. 왜냐면 민심은 천심이라는 공자 말씀은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핀은 교황에게 “실력이 있는데 왕손이 아닌 자가 왕이 돼야하는가, 아니면 왕손이지만 실력이 없는자가 왕이 돼야하는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보낸다. 그리고 이면으로 로마를 분탕질하고 있는 롬바르드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교황에게 바치겠다는 메세지를 보낸다.

로마 교황이 옆구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이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메로빙거왕가는 펄펄 날던 시절에도 단 한 차례도 교황을 도와주지 않았다. 하물며 피핀은 야만족을 몰아내주고 그 땅까지 준다는데…

결국 교황은 피핀에게 “왕손이 아니더라도 실력 있는 자가 왕이 돼야한다”고 피핀이 기다리는 답변을 해줬고 피핀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교황의 선언에 따라 메로빙거 왕조를 멸하고 유럽 역사상 유일무이한 역성혁명을 이뤄낸다.

하지만 피핀은 고민에 빠졌다. 실력 있는 자가 왕이 돼야한다면 언제라도 피핀보다 실력 있는자가 나오면 그놈에게 왕 자리를 줘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핀이 생각한 것은 대관식(戴冠式)이다. 교황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피핀에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면 피핀의 왕 자리는 하느님이 내려주게 된다. 바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태동이다. 이에 피핀은 교황을 불러 생드니 대성당과 랭스 대성당에서 각각 기름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가진다.

이후 프랑스국왕들은 모두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갖고 왕위에 올랐다. 랭스대성당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프랑스국왕은 정통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실제 영국과 100년 전쟁에서 랭스를 상실한 샤를7세는 랭스 대성당으로 갈 수가 없어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고 때문에 실제적으론 국왕이었어도 도팽(우리말로 세자)의 신분은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 추다르크 언니 잔다르크가 도팽 샤를을 국왕 샤를7세로 만들어준다.

다시 피핀으로 돌아가서.. 피핀은 교황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롬바르드족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땅의 일부를 교황령으로 기증했고 동로마 황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자신의 두아들 카를(훗날 샤를마뉴)과 카를로만도 로마교황에게 기름부음을 받도록 해 차기 국왕으로 인정받게 했다.

피핀의 교황에 대한 충성맹세는 뒤를이은 샤를마뉴에게도 이어진다. 샤를마뉴는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사라센의 침공을 막아내고 아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황제로 대관된다. 피핀 이후부터 프랑크왕국과 왕국의 분국 군주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가톨릭을 믿었고 전도했다. 이는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때까지 이어지는 중세(中世)의 시작이다.

국내에서 프랑크왕국의 국왕으로 잘알려진 사람은 단연 샤를마뉴일 것이다. 이것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의 가톨릭 유럽을 만든 왕은 피핀이다.

피핀의 역성혁명으로 인해 가톨릭은 온 유럽에 퍼지게 됐고 지금도 유럽 인구의 절반이 믿는 무소불위의 종교로 자리잡게 됐다. 그러나 그 원인은 한 왕의 욕심이다. 역성혁명으로 정통성 없이 왕이 됐고 왕이 된 후 자손 대대로 왕좌를 누리겠다는 피핀의 욕심이 지금의 유럽=가톨릭이란 공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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