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포스트=김혜경 기자] “진나라 도와 대륙 통일시켜 혼란 잠재우자” VS “우리는 반전주의자. 어떻게 전쟁을 종용하나”


중국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반전을 외치며 약소국 방어에 모든 것을 바친 묵가, 그러나 혼란스런 상황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가 갈수록 전쟁은 더 빈번하게 일어났고 묵가 제자들이 희생당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습니다. 대륙 전체가 전장으로 변할 정도로 상황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묵가는 고민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그들의 딜레마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해야 겸애를 이 땅에 실천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갈수록 묵자 집단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중 제일 힘을 얻었던 것이 통일로 대륙의 혼란을 잠재우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은 어느 국가의 주도로 해야 할까요? 이에 많은 묵가 제자들이 진(秦)나라로 눈을 돌립니다.


사실 진나라를 점찍고 있었던 당시 지식인 부류는 묵가뿐만이 아닙니다. 진나라의 근간이 된 학문이라고 하면 대다수는 묵가 보다는 법가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특히 법가가 배출한 슈퍼스타급 재상인 상앙, 이사, 그리고 재상은 아니지만 한비자 등이 먼저 생각날 텐데요. 이들 또한 미래 대륙 통일 국가로 진나라를 낙점하고 스스로 걸어 들어온 외국인들이죠.


다른 국가들에게 오랑캐 취급을 받고,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리적 약점으로 인해 허약했던 진나라가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재 확보가 필수였습니다. 귀족들의 텃세로 정계 진출의 벽이 높았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수월했습니다.


묵가 또한 이같은 진나라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 것이지요. 진나라 입장에서도 뜬구름 잡는 것이 아닌 현실정치에 바로 적용 가능한 정책을 보유하고 있는 묵가를 탐냈을 것입니다. 묵가에게는 진나라가 그들의 이상을 신명나게 펼쳐볼 하나의 무대가 됐을 것이구요.


내치에 있어서는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지만 대륙 통일은 묵가에게 큰 딜레마로 다가왔습니다. 통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전쟁이 필요합니다. 상대국이 스스로 나라를 바치지 않는 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요소죠. 그러나 묵가 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가 비공과 반전, 전쟁을 종용한다면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이같은 모순에도 진으로 달려진 묵가들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혼란의 종지부를 찍고 겸애를 현실화시키길 원했습니다.


진나라 통일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묵가 내부의 비극도 심화됩니다. 진으로 달려간 ‘진(秦)묵’ 무리는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고, 반면 여전히 신념을 고수한 ‘진(眞)묵’은 진나라 침공에 약소국 방어를 하는데 사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 때 동료였던 묵가 제자끼리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일도 발생했겠죠. 통일 제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두 노선으로 나뉜 묵가 무리의 사상 논쟁이 있었습니다.


통일 진나라가 들어서기 전 이미 묵가의 절반은 희생됐습니다. 그렇다면 진나라로 달려가 공을 세운 또 다른 묵가 무리는 축배를 들 수 있었을까요? 통일 완성에 큰 공을 세웠지만 진나라가 그들을 필요로 한 것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공권력을 독점하는 국가의 특성상 막강한 무력과 정치적 스킬까지 겸비한 독립집단인 그들을 곱게 내버려 둘 수 있었을까요?


묵가 또한 변해가는 시황제의 태도에 의문을 품으며 쓴 소리를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도권에 포섭이 되면 기득권을 대변하거나 스스로가 기득권층이 되곤 하는데 묵자가 하층민을 대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가 그들의 이상을 구현하는데 어긋나기 시작하자 비판을 시작했고, 이는 결국 대대적인 묵가 탄압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분서갱유, 유학자들을 구덩이에 묻은 이 끔찍한 사건은 사실 유학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묵가 학살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묵가 무리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 중 일부는 강호로 숨어들어가 협객이 되었다고 합니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강호로 무대를 옮겨 민중의 억울함을 풀어주곤 했다는 것이죠. 또 일부는 행정 관료나 법학 지식인으로 신분을 세탁해서 살아갔습니다.


이들이 더 이상 그들 집단이 내세웠던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묵가는 사상적 절멸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 후 청나라 말엽이 되어서야 학자 몇몇이 <묵자> 원문에 주석을 다는 등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너무나 특이한 존재였던 묵가,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모든 개개인이 행복한 사회를 꿈꿨던 이들의 사상은 몇 천 년이 지난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없는 세계, 모든 사람이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받는 국가,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갈망하는 세상이 아닐까요? 아비규환 속에서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했던 묵가,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 ‘헬’같은 한국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사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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