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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현대인들이 당뇨병·관절염·다발성경화증 등 자가면역질환에 걸리기 쉬운 이유가 14세기 맹위를 떨쳤던 흑사병의 영향이라는 연구가 발표됐다. 이번 연구결과는 흑사병이 인간의 면역 체계를 변화시켰음을 시사하고 있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전염병은 피부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는 증상과 높은 치사율 때문에 '흑사병(Black Death)'으로 불렸다. 흑사병은 창궐 3년 만에 중세 유럽에서만 인구 절반의 생명을 앗아간 유럽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되고 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미국 시카고대학·파스퇴르연구소 등 공동연구팀은 흑사병의 면역 관련 유전자를 특정해 한때는 흑사병으로부터 지켜준 유전자가 현대의 자가면역질환 증가와 관련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논문은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출처/Nature

연구팀은 흑사병으로 발생한 대규모 사망이 진화적 관점에서 큰 변화를 초래했을 것으로 보고, 흑사병 이전에 사망한 사람·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시신에서 DNA 샘플을 추출해 흑사병과 관련된 유전적 적응 징후를 조사했다.

구체적으로 1348~1349년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거 매장된 영국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 공동묘지 등 2곳에서 뼈 318구, 덴마크 소재 묘지 5곳에서 뼈 198구 등을 확보했다. 

연구팀은 뼈에서 DNA를 추출한 뒤 염기서열을 분석해 페스트균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를 추렸다. 그 결과 4개의 유전자가 병원균 침입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단백질 생성에 관여해 흑사병 감염 여부를 구분한 것으로 나타났다.

흑사병이 유행했던 14세기 당시 유럽인들은 흑사병에 대한 저항력이 거의 없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팬데믹이 반복되면서 사망률은 점점 낮아졌다. 

이와 관련된 것이 4개의 특정 유전자 가운데 페스트균을 방어한 것으로 추정되는 'ERAP2'다. ERAP2 유전자는 면역 체계가 감염원을 인식하는 역할을 하는데, ERAP2에 변이(rs2549794)가 발생하면 단백질을 보다 많이 생성해 면역 체계의 감염원 인식률을 높인다. 

ⓒ데일리포스트=이미지 출처/런던고고학박물관(MOLA)

ERAP2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생존율이 40%~50% 높았을 것으로 연구팀은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세시대 흑사병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 ERAP2 유전자 변이가 진화적으로 선택되면서 현대인들은 되려 자가면역질환에 걸리기 쉬워졌다. ERAP2는 내장에 존재하는 우호적 박테리아까지 공격해 해로운 염증을 일으키는 크론병의 위험을 높이는 위험인자로도 알려져 있다. 논문 저자인 루이스 바레이로(Luis Barreiro) 시카고대 교수는 "ERAP2가 역할을 너무 잘하면 적뿐만 아니라 친구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ERAP2 유전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인간의 가장 큰 진화적 이점이며, 이는 흑사병이 인간 면역 체계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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