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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 '대조 실험'은 결과를 검증하기 위한 비교 대상이 있는 실험이다. 효과를 확인하고 신약과 효과 없는 위약을 이용한 임상실험 등 의학 및 과학 발전에 필수적인 제어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 행해진 대조 실험은 실험 참여자의 목숨을 빼앗는 잔인한 내용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 

미국 터프츠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아리샤 랭킨의 저서 'The Poison Trials'에 따르면 16세기 유럽에서는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독성 실험이 다수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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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독극물 실험의 발단은 1524년 이탈리아 의사 그레고리오 카라비타(Gregorio Caravita)가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년 11월 26일 ~ 1534년 9월 25일)에 해독제로 약용 오일을 헌상한 것이었다. 

당시 불안정한 이탈리아 정세 속에서 독을 두려워한 클레멘스 7세는 카라비타에게 오일 효과를 확인하는 실험을 지시했다.

실험 대상자로 절도와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코르시카인 2명이 선정됐다. 카라비타는 2명에게 치명적인 독을 섞은 빵을 먹이고, 이들이 괴로워하기 시작하자 한쪽만 자신의 오일을 주었다.

그 결과, 치료를 받지 못한 죄수는 4시간의 고통 끝에 사망했다. 오일을 먹은 사형수는 살아남아 실험에 참가한 보상으로 사형에서 '종신 노예'로 감형됐다. 

이 실험 이후 로마 교회 소속 의사와 약사들은 해독제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카라비타의 오일을 날달걀·설탕·비소와 섞어 다른 사형수에게 먹이는 추가 시험을 실시했다. 이 남성은 실험에서 살아남아 사형을 면하고 조리실 노예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일련의 실험 이후 로마 교회의 의사들은 '독의 효과'와 '사형수가 살아날 수 있기를 기도한 사람들의 신앙심'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이후에도 적어도 10개 이상의 인체 실험이 있었다는 문헌이 존재하며,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인체 실험도 다수 이루어졌다. 

16세기 유럽에서 이러한 실험이 반복된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독이 매우 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독성이 있는 약초나 버섯을 섭취하거나, 독사에 물려 죽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치명적인 독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었고 가정에서 쥐를 잡거나 정치 지도자를 암살하는 등 다양하게 독이 사용됐다. 

교황 클레멘스 7세 ⓒ 데일리포스트 이미지 출처=wikipedia

당시 중세 유럽 사람들은 전염병이 특정 독이 사람에서 사람에게 감염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해독제의 발견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자신의 몸을 지키는 동시에 재앙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한편, 인류가 대조 실험을 실시한 것은 당시가 처음은 아니었다. 2세기 경에 활약한 고대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가 독을 먹인 닭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에만 해독제를 주는 대조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 언제부턴가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의료가 사라지고, 종교색이 강한 의료 행위와 주술에 가까운 민간 의료가 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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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흐름을 바꾸고 통일된 실험 형식과 탄탄한 검증이 의료에 적용된 계기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실험이었다고 랭킨 교수는 지적한다.

당시 의사들은 시장에 가짜 해독약을 파는 사기꾼들과 자신들을 차별화시키기 위해 실험에 열정을 쏟았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실험 내용도 사회적 이익에 대한 언급이나 사형수의 사전 동의를 얻는 등 인도적 배려가 담기기 시작했다. 

랭킹 교수의 저서 'The Poison Trials'의 서평을 학술지 네이처에 기고한 앨리슨 애보트는 "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여기는 현대 의학이 초창기에 행한 일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동시에 그러한 수법이 언제, 어떻게 오늘날 의료 윤리로 부르는 것에 원시적 시도로 포함되었는지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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