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포스트=김정은 일본전문 기자]지난 2014년 추악한 갑질의 대명사로 부각됐던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을 시작으로 전 세계인들의 패리디물로 전락한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의 ‘노룩패스’, 정우현 전 MPK그룹 회장과 이장한 종근당 회장의 치졸한 갑질, 공관병에게 팔찌까지 채우며 노예처럼 부려먹은 박찬주 육군대장 부부까지 한국사회의 갈등요인은 이제 양극화에서 ‘갑질’로 전이되고 있다.

사실 갑질은 최근 다시 부각되고 있을 뿐 전혀 새로운 사회 현상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내부고발자의 불이익 등으로 수면 밑에 가라앉았을 뿐이다. 갑질 사태 재조명은 우리사회의 분위기 변화를 반증하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에는 높아진 인권의식과 개인의 억울함이 빠르게 전파될 수 있는 SNS의 급속한 확산도 한 몫 거들고 있다.

일본 사회 흔들고 있는 파워하라

이 같은 갑질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은 ‘파워하라(Power Harassment)’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국 갑질과 유사한 의미인 파워하라는 힘을 뜻하는 Power와 괴롭힘을 의미하는 Harassment를 합친 일본식 조어로 권력형 폭력, 주로 회사나 상사의 권력을 이용한 괴롭힘을 지칭한다.



구체적으로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 지위적 우위를 배경으로 인격과 존엄을 침해하는 언동을 지속적으로 행하거나 ▲ 업무의 적정한 범위를 초과하여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주거나 ▲ 고용불안을 주며 위협하거나 ▲ 직장 내 환경/관계 등을 악화시키는 행위 등을 총칭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상사로부터 업무와 관련해 강한 질책을 받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상담이 급증하고 있다. 2016년 일본 노동국 전체에 접수된 노동 상담에서 ‘괴롭힘/따돌림’은 전년 대비 6.5% 증가한 7만 917건에 달하며 ‘해고’를 제치고 5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올해 5월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일본 직장인 3명 중 1명은 최근 3년간 직장에서 직장상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응답했다.

한국 갑질 사례와 유사한 굵직한 사건들도 자주 보도된다. 6월 일본 언론들은 J리그의 나카니시 다이스케 상무이사가 지속적인 직장내 성희롱과 파워하라로 고발당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1997년부터 J리그에서 일한 나카니시 이사는 20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우울증 등 마음의 병으로 인한 산업재해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파워하라는 그 중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파워하라 문제가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피해자의 자신감을 잃게 하고 우울증을 유발해 최악의 경우 자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014년 도쿄의 한 경찰관이 공개 모욕과 협박, 욕 등 상사의 괴롭힘 때문에 자살했는데 상사는 장례식장에 나타나 “내 말이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힘들게 할 줄 몰랐다”고 억울함을 토로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자신의 가학 행위가 상대방을 힘들게 할 줄 몰랐다는 공감의 부재는 박찬주 사령관의 부인의 '아들같이 생각해서 그랬다'는 궤변과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향후 5년 동안 연간 3만명에 육박하는 자살자를 대폭 줄이기 위한 긴급 ‘자살 종합대책’을 마련했는데 특히 파워하라 문제 등을 감안해 근로 문제에 따른 자살대책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근로문제로 인한 자살은 2016년 1978명에 달해 전체의 약 10%를 차지한다. 이에 일본 정부는 장시간 근로 시정을 위해 기업 감독지도를 강화하는 한편, 직장에서 정신건강 대책과 직장 내 권력형 폭력 대책도 병행 추진하도록 하고 있다.

덴쓰 사태를 계기로 사회적 관심 높아져

2015년 12월 일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린 광고회사 덴쓰(電通) 신입사원의 자살 사건은 일본의 직장내 과로자살과 파워하라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인식된다.



덴쓰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광고회사로 취업 준비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명문 도쿄대를 졸업한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高橋まつり·여·사망 당시 만 24세)씨는 한 달에 100시간이 넘는 초과근무를 하다 사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 직전인 10월 하순에는 53시간 연속해서 거의 회사에만 머무는 등 극한 상황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덴쓰의 불법적인 장시간 근로와 악명 높은 사내 분위기 등이 알려졌고 일본 사회 전체에 일부 기업의 무리한 근로 관행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일본 취업희망 기업 1위를 차지하던 덴쓰는 올해 한 일본 취업활동 사이트에서 23위까지 급락했고 덴쓰 이시이 타다시(石井直) 대표이사는 과로자살 파문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이 계속되자 올해 1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갓 입사한 사원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통상적인 사원과 같은 지시를 받았다. 전체적으로 이 문제는 ‘파워하라’로 일컬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덴쓰는 지난 7월 재발 방지를 위해 주4일제 도입을 비롯해 직원의 노동시간을 오는 2019년까지 20% 감축하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해법찾기 나선 일본

덴쓰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잔업 금지’ 바람이 불며 일터가 일보다 사람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높은 수준인 일본의 장시간노동이 지속적으로 문제되자 일본 정부 차원에서 잔업 근무 시간 공개 의무화를 추진하고 문제 시 벌금을 물리기로 하는 등 대책 마련도 지속하고 있다.

아울러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장시간 근로 시정, 유연한 근로 방식을 위한 환경 정비, 비정규직 처우개선 등 9가지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일하는 방식 개혁'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장관급인 ‘일하는 방식 개혁 담당상’을 신설하는 등 ‘유연한 노동’에 주력하고 있다. '일하는 방식 개혁' 방안은 준비 기간을 거쳐 2019년에 본격적으로 도입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쉬는 방식’의 개입에도 나서 2018년 각 기업의 연차 유급휴가를 현행 대비 3일 늘릴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방침에 따라 유급휴가를 늘린 기업에는 지원 혜택을 제공하는 등 새로운 시스템 도입도 구상중이다.

또한 후생노동성은 '업무상 지위나 인간관계를 이용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업무상 적절한 범위를 넘는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파워하라로 규정하고 다양한 방지책을 강구 작업에 착수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퇴근 후 카톡 금지법’ 역시 일본이 한발 빠르다. 국내의 경우 직장인들의귀를 솔깃하게 하는 법안발의라는 평가지만 실제 법안 논의에 대해선 회의적 시각이 팽배하다.



일본에서는 국민메신저라고 불리는 ‘라인(LINE)’을 통한 과도한 업무지시가 심각한 노동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미 퇴근 후 상사가 업무연락을 하는 것을 노동기준법 상으로 금지하고 위반할 경우 벌칙 규정까지 만들었다.

갑질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 필요...“영원한 갑은 없다

일본의 높은 취업률이 경기회복의 청신호로 화제가 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이면을 들여다보면, 일본 역시 장시간 노동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대표되는 ‘파워하라’라는 그릇된 관행은 여전하다. 과로자살로 물의를 빚은 덴쓰의 경우도 직원들이 근무시간을 축소 신고하라는 압력까지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최근 들어 정부와 사측의 파워하라 대책 마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주목할 점은 일련의 사태와 다양한 정책적 지원 속에 일본사회 자체가 갑질을 견디기 위해 부당함을 참거나 장시간 노동으로 일벌레가 되는 것이 결코 미덕이 아니라는 분위기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파워하라를 근절하는 것이 근로자 삶의 질을 높여 사회 전체에 득이라는 인식이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반면 우리의 ‘갑질’에 대한 정책적 관심과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갑질’로 인한 괴롭힘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사회의 문제다. 따라서 불평등과 차별을 개선하려는 사회적 합의 없이는 무의미하며 해법 역시 일본처럼 조직과 사회 모두가 나서 고민해야 한다.

특히 한국사회의 갑질 논란 핵심은 ‘근거 없는 불평등’에 있다. 평등이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일 뿐이라 하더라도 근거 없고 불합리한 불평등까지 용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구나 갑이 될 수도 을이 될 수도 있다. 갑질로 국민들 앞에 고개를 숙인 많은 ‘갑들’과 교도소 죄인 신세로 전락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에서 빠르게 변하는 사회구조에서 “영원한 갑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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