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포스트=김혜경 기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영국의 전후 작가 조지오웰(George Orwell)의 작품 <1984년>은 1949년 당시 전체주의 체제의 사회상을 예측하며 작성한 세계 3대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의어) 소설 중 하나입니다.


출간과 함께 전 세계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원천이 됐던 이 책은 21세기 어느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층에게 또 다른 영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웰이 묘사한 전체주의 시스템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이들은 마치 1984년의 현실화를 꿈꾸는 듯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 존재하는지도 의문인 독재자 ‘빅 브라더’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받치는 사람들, ‘자유는 속박이다(Freedom is Slavery)’라는 슬로건이 상식처럼 통하는 국가, ‘텔레스크린(Telescreen)’을 통한 24시간 밀착 감시, ‘뉴스피크(Newspeak)’라는 언어를 통한 사상 통제, ‘이중사고(Doublethink)’를 통한 자기 검열 등 <1984년>의 배경은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지난 2일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정부가 여당이 밀어붙였던 테러방지법이 결국 국회 문턱을 넘고야 말았습니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에 반대해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낸 야당 의원들이 192시간 동안 무제한 토론을 진행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법안은 독소 조항을 안은 채로 통과됐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한 지난달 23일부터 시작된 필리버스터는 ‘마국텔(마이국회텔레비전)’이라는 정치 축제로 발전했습니다. 수만명의 국민들이 매일 필리버스터 생중계를 보며 의견을 나누는가 하면 국회 방청석도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간 가슴에 품었던 국민들의 의견은 SNS를 통해 의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됐고, 일부는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국민들은 역사의 한 자락에서 서서 민주주의의 ‘흥’과 ‘쇠’를 동시에 목도하고 있습니다.


테러방지법의 독소 조항은 크게 3가지입니다. 영장 없이 금융거래 자료를 국정원에 제공하도록 하는 부칙 ‘2조 1항’과 영장 없는 감청을 확대하는 부칙 ‘2조 2항’, 그리고 “국정원장은 대테러활동에 필요한 정보와 자료 수집을 위해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9조 4항입니다.


영장도 없이 조사 대상자에게 자료제출과 진술을 요구하는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법안에서 지칭하는 ‘테러위험인물’이라는 단어 또한 그 기준의 모호성으로 누구나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한 마디로 “당신이 위험인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사실 확인을 위해 당신을 한 번 털어봐야겠다”라는 것이죠.


<1984년>에 등장하는 일당독재 국가에도 국정원과 흡사한 조직이 있습니다. ‘사랑부(Ministry of Love)’라 불리는 정부 부처는 법과 질서, 불량 국민 개조를 담당합니다.?사랑부는 비밀스런 감시를 시행하는 유령이자, 국민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는 빅브라더 그 자체입니다.


‘착한 국민’에 벗어난 사람들을 각종 혹독한 방법을 통해 ‘통치자를 사랑하는 자’로 전면 탈바꿈시킵니다. 사랑부의 ‘101호’는 과거 국정원을 지칭하는 ‘남산’처럼 악명이 높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우리가 항상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라는 말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유신 통치 시절 국정원이 저질러왔던 폭력의 역사부터 스파이웨어를 이용한 국민 감청 등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무제한 권력을 쥔 기관을 통제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혹자는 “나 같은 일반인은 별다른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감시당할 일 없겠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행동을 제약하도록 만드는 공포가 바로 ‘자기 검열’이자 테러방지법의 목적입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뿌리는 민주주의입니다. 국민들은 ‘정치’를 원하는 것이지 일방적인 ‘통치’를 원하지 않습니다. 필리버스터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국민들을 떠올려 보면 쉽게 가늠이 됩니다. 정치가 부재하는 곳에서는 제국이 탄생합니다. <1984년>의 전체주의 시스템이 21세기 한국 사회에 끊임없는 노크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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