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세력 하나회 해산과 악습·폐단 척결

문민정부 초기부터 대형사고 잇따른 ‘악재’

[데일리포스트=송협 기자]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 1993년 2월25일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의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1961년 탱크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박정희 소장의 군사 쿠데타 이후 서슬 퍼런 군부정권은 5대 대통령부터 9대까지 무려 19년간 권좌를 차지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의 총탄에 쓰러지던 그해 겨울 12월12일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군인이 차지했고 뒤를 이어 12,12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까지 무려 32년간 지속돼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제보다 더 공포스럽던 군부정권 32년의 끈을 끊어내고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정부를 ‘문민정부(文民政府)’라 칭했습니다.

비록 3당 합당(야합이라고도 함)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에서 배출된 대통령이었지만 김영삼 정부는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의 최초 정부라는 수식어는 결코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가장 먼저 개혁과 오랜된 부패를 척결하는 등 일신정책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32년간 군부정권의 든든한 배경이던 군부 사조직 하나회를 해산시켜 쿠데타의 불씨를 잠재웠고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5.18민주항쟁을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을 구속 수감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의 칼’을 들고 정치와 경제, 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까지 일시에 쇄신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개혁과 폐단의 싹을 잘라내기 위한 문민정부의 일신정책과 민주주의의 달콤함에 너무 심취했던 걸까요? 집권초기부터 국민을 위한 문민정부를 흠집내는 사건과 사고도 끊임없이 이어져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많았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데일리포스트>는 이번 故 김영삼 대통령 서거를 통해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하는 문민정부의 개막과 더불어 김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펼쳤던 업적과 함께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김일성 사망에 이르기까지 문민정부 시대를 거쳤던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사회 이슈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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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초기 1993년~1994년]

하나회 이미지

1993년 3월 8일 - 군사 쿠데타 세력 ‘하나회’ 척결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가장 먼저 단행한 것은 지난 정권의 충복조직이며 12.12군사쿠데타 주역인 ‘하나회’에 대한 즉각적인 척결에 나섰습니다. 하나회 해산은 향후 군사 쿠데타의 힘을 무력화하는데 기인했습니다.

부산구포역 전복

1993년 3월 28일 - 부산 구포역 열차 전복사고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초기인 지난 1993년 3월28일 오후 5시29분께 부산광역시 경부선 하행선 구포역 인근 삼성종합건설 공사현장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이 사고로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가 속출했고 이 사고는 과거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사망자수를 경신한 최악의 철도사고로 기록됨과 동시에 향후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등 굵직굵직한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문민정부 안전불감증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목포아시아나

1993년 7월 26일 - 아시아나항공 733편 해남 야산서 추락

문민정부 출범 첫 해 초기 7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부산 구포 열차 전복 사고의 후유증이 상흔으로 남아있던 1993년 7월26일 이번에는 항공기 추락사고 소식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날 오후 2시20분께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오후 3시15분 전남 목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아시아나항공 소속 737-500기가 기상악화로 착륙을 시도하다 전남 해남군 화원면 인근 뒷산으로 추락하면서 68명의 승객이 사망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금융실명제

▲1993년 3월 31일 -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

문민시대를 개막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목록을 전 국민에게 공개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과 부인 손명순 여사의 상도동 자택과 고향 거제군 장목리 전답, 그리고 승용차와 헬스클럽 회원권 등 총 6억 8000만원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이번 재산 공개는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다”천명하고 아울러 공직자들의 새산공개를 종용한 바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 부부의 재산 공개 이후 정부의 3부요인과 고위 공무원들이 잇따라 재산을 공개했고 이는 향후 금융거래실명제의 촉매제가 됩니다.

서해페리호

1993년 10월10일 -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는 1993년 10월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110톤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사고로 2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였습니다.

피해자 대다수는 섬 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며 당시 여객선 회사는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워 시체가 무리져 발견되는 등 인명피해가 심각하다보니 당시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부산 구포 열차사고와 아시아나항공 추락에 이어 이번에는 서해훼리호 침몰까지 문민정부 들어 보기드문 ‘육해공’ 사고를 다 겪어본다는 풍자까지 나돌았습니다.

292명의 생명을 앗아갔던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 21년이 흐른 지난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0분께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에서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수학여행 중이던 학생과 일반인 등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는 참사가 재연되면서 국민들의 가슴을 또 다시 울렸습니다.

김일성 사망

1994년 7월 8일 - 김일성 주석 심근경색 사망

문민정부 집권 2년째를 맞은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의 급작스런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한민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가 들썩거렸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사망 전인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으면 회담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8일 새벽 2시 평양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를 두고 각국의 정치 전문가들은 남북 정상회담의 부담과 체제 승계 불안감을 느낀 김정일 추종세력들이 김 주석을 독살했다는 추측도 난무했습니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의 1994년는 그야말로 전 세계가 들썩 거리는 사건사고로 얼룩진 한 해였습니다. 5명의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앗아간 연쇄살인집단인 지존파 사건을 비롯해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이르기까지 문민정부의 민생안전은 ‘0점’이라며 지지율까지 하락하는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습니다.

지존파

1994년 9월 21일 - 희대의 살인집단 ‘지존파’ 사건

‘지존파 사건(至尊派 事件)’은 김기환 등 지존파 일당 7명이 1993년 7월부터 9월까지 민간인 남녀 5명을 잔인하게 살인한 희대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아지트에 소각장을 만들어 놓고 납치한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사체를 소각장에서 태워 증거를 인멸했습니다. 또 살해된 사체의 인육을 먹기도하는 엽기적인 행각도 보였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존파 사건은 납치됐다 탈출한 여성의 신고로 일단락됐으며 체포된 지존파 일당 7명 중 6명은 1995년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성수대교

1994년 10월 21일 - 성수대교 붕괴 사고

문민정부 집권 2년이 마무리 되고 있던 지난 1994년 10월21일 이날은 서해훼미리호 침몰 1주기를 막 넘긴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 오전 7시30분께 평소와 다름없이 성수대교를 향해 출근과 통학에 나섰던 사람들 중 24명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성수대교는 당초 트러스식 공법으로 시공됐는데 이 공법은 이음새가 부실할 경우 붕괴될 가능성이 높은 위험천만 공법이지만 점검부실과 내부결함에 대해 무심했던 시공사와 서울시의 관리감독 소홀로 결국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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