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손 ‘덕후’ 모시기 나선 유통업계


# 사회초년생인 이모(25·여)씨, 추모(25·여)씨, 김모(26·여)씨는 영국SF드라마 ‘닥터후(Doctor Who)’의 열혈 매니아들이다. 이 드라마에는 매니아라면 탐낼 만한 각종 특이한 소품들이 등장한다. 그 중 가장 상징적인 물건은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파란색 박스 모양의 타임머신이다. 이들은 이 파란색 장난감을 사기 위해 온갖 인터넷 쇼핑몰을 다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호주 현지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해당 물건을 공수해왔다.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각자 주문한 상품을 들고 이씨의 집에 모였다.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놓고 감상을 하고 있는 이들을 발견한 이씨의 어머니가 “아니 너희는 이런 애들 장난감 좋아하니?”라며 한 마디 던지고 지나간다. 이에 김씨는 “네 이게 저희 취미에요”라고 답한다.


최근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키덜트’가 늘고 있다. 키덜트(Kid+Adult)란 아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로 ‘아이들의 감성과 문화를 추구하는 성인’을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키덜트는 예전부터 많았다. 다만 어른이 아이들 물건을 즐긴다는 사회의 곱지 못한 시선에 그들은 수면 밑에서 조용히 그들만의 취미를 즐겼을 뿐이다.


이런 키덜트족들이 이제는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유명인들이 자신이 키덜트족임을 밝히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키덜트족 커밍아웃이 쉬워지고 있다. 유통업계에서는 이들을 한 몫 톡톡히 가져다주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해 이들을 모시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고 있다. 특히 과거 아동이 주 소비자층이었던 완구업계에서는 키덜트족이 큰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키덜트란 합성어의 기원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IT업계 종사자인 짐 워드 니콜스가 미국 뉴저지 스티븐슨 공대 재학 당시 교내 잡지에 어린이 문화를 어른이 되어서도 즐긴다는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 이후 1985년 8월 피터 마틴이 뉴욕타임스에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키덜트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키덜트 문화는 과거 전통적인 완구 시장과는 다르다. 키덜트산업의 시작은 완구산업이었으나 이제 그 범위가 너무나도 넓어져 버렸다. 전통적으로 키덜트족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프라모델’과 ‘레고’에서부터 최근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상품들, 그리고 ‘드론’까지 키덜트 산업의 범위는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키덜트 시장의 규모는 연 1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되며 매년 20~30%씩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키덜트 산업은 현재 최고의 블루오션으로 부상해 최근 악화일로를 겪고 있던 유통업계에 한 줄기 빛이 되고 있다.


실제 이마트의 조립?취미완구 부문 매출은 지난해 이어진 불황에도 불구하고 2013년 대비 15%나 신장했다. 특히 해당 매장의 연령별 매출 구성비 중 40대 소비자가 52%에 달한다는 점으로 미뤄봤을 때 키덜트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키덜트족을 통한 타 상품의 부가 매출 향상도 기대 중이다.


또 올해 어린이날을 앞두고 한 소셜커머스 업체가 네티즌들을 상대로 진행한 재미있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었다.


소셜 커머스 G9가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조카를 둔 네티즌 524명을 대상으로 ‘어린이날 조카 선물’에 대한 설문을 실시한 결과 10명 중 4명 가량이 ‘조카에게 주려고 산 선물이지만 그냥 내가 갖고 싶은 적이 있었다’(41%)고 응답했다.


탐난 적 있었던 조카 선물로는 남성의 경우 ▲‘로봇’(24%), ▲‘게임기/디지털기기’(21%), ▲‘블록/퍼즐’(20%) 순으로 답했다. 여성은 ▲‘인형’(29%), ▲’패션잡화’(22%), ▲’게임기/디지털기기’(16%) 순으로 조사됐다.


?키덜트 열풍은 의류업계에도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랜드그룹의 SPA브랜드 스파오는 ‘어벤져스’ 등 영화를 활용해 만든 ‘그래픽 티셔츠’로 키덜트 시장을 이끌고 있다.


스파오의 경우 올해 1~4월 출시한 그래픽 티셔츠의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5배 늘었다. 해당 상품이 전체 여름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12년부터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 비중은 전년 대비 30% 증가했다.


업계 관계자는 “어른들은 어린이와 달리 자신이 갖고 싶은 물풀에 대한 의사결정이 구매로 즉시 이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키덜트족을 잡기 위한 상품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 국내 키덜트 시장에는 어느 정도 영화 쏠림 현상이 있어 영화 개봉 이슈에 맞춰 캐릭터 상품을 내놓고 있다”며 “최근 화제작이었던 ‘어벤져스 2’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덧붙였다.


영화 관련 캐릭터 상품을 주로 수집한다는 소비자 A씨는 “장난감을 사 모을 때마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저절로 흥이 난다”며 “나에게는 그저 평범한 취미 중 하나 일 뿐”이라고 말했다.


자칭 ‘수집광’이라는 소비자 B씨는 “나같은 부류들은 해당 상품을 사서 어떠한 방법으로 가지고 노는데 중점을 둔 다기 보다는 ‘수집하는 그 자체’를 즐긴다”며 “수집품들이 늘어날때마다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키덜트 문화를 ‘성인들의 가벼운 일탈’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키덜트는 현대 성인들의 각박한 삶에서 벗어나 즐거운 삶을 영위하고자하는 심리 상태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 옛 어린 시절의 환상을 통해 정서적 안정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여전히 일각에서는 키덜트족들을 곱지 못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도 있다. 이들 눈에는 키덜트족들이 ‘철없는 어른’ 혹은 ‘돈이 넘쳐나서 저런 장난감이나 사고 있다’며 아니꼽게 본다. ?키덜트족의 취미를 하나의 ‘개인 취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애들이나 하는 비성숙한 행위라고 낙인 찍는다.


키덜트문화는 과거 ‘피터팬신드롬’이라 조롱받으며 정신적 퇴행을 지칭하는 비주류 문화로 인식됐지만 현재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키덜트문화는 장난감 뿐만 아니라 화장품, 영화, 음식, 미술 등 전방위로 퍼져나가며 장벽을 허물고 있다. 이 문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른아이’는 이제 더 이상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만의 톡톡 튀는 창의력과 아이디어를 무기로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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