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서민 애환 그려낸 한국판 ‘찰리채플린’

[데일리포스트=황선영 기자] “풍족하지 못한 시절,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가난에 찌들고 고달팠던 시대, 구봉서는 삶의 희망이며 굳게 닫힌 서민들의 마음을 열게 만들어 준 웃음 전도사였습니다.”

올해 칠순을 넘긴 박인혁(가명·71)씨는 원로 희극인 구봉서씨의 별세 소식에 눈시울을 붉히며 이 같이 소회했습니다.

‘한곡조 꽝’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등 숱한 유행어를 세상에 남긴 코믹 유행어 원조이며 가난한 삶이 고달픈 서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공감했던 시대의 광대, 격동의 시대를 웃음으로 승화시킨 한국판 ‘찰리채플린’ 원로 희극인 구봉서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90세, 그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故구봉서씨는 50~60년대 전후(戰後)혼란과 가난이 극심했던 시기, 가난한 서민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그려낸? 천상 희극인이었습니다.

굴곡 많고 고단한 삶을 웃음과 해학으로 보듬어 주던 구봉서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의 황제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대목입니다.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50년~60년대 지금은 작고한 김희갑을 비롯해 김승호, 양훈, 서영춘, 배삼용 등 쟁쟁한 희극인들과 함께 400편을 넘나드는 악극과 영화, 방송을 통해 서민들 속 곳곳에서 함께 살아왔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충무로 영화판을 통해 코믹영화의 초석을 다졌던 구봉서는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에서 신음하고 있던 국민들의 또 다른 해방구였습니다.

故 구봉서, 그의 전성기를 열었던 60~70년대 영화와 방송을 보면 그가 경험한 시대적 아픔과 서민들의 박복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내려 있습니다. 늙은 독재 정권과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총칼이 국민들의 숨통을 조여왔던 통한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던 것 역시 구봉서와 같은 코미디언들의 희망 메시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자부할 수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혼란스런 정세 속에 희망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며 코믹스런 몸부림을 통해 희망을 전달했던 구봉서, 어떤 장르, 어떤 역할도 충분히 소화해내는 그는 가히 1세대 만능 엔터테이너였습니다.

그는 시대의 배우이며 가수였고 코미디언이었고 시대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좌표를 던지는 멘토였습니다. 그가 있는 곳이 곧 무대가 됐고 그가 보인 몸짓은 연기가 돼 갈피 못잡고 헤매고 있는 서민 약자들의 해방구가 됐습니다.

앞서 언급한 박인혁 할아버지 말씀처럼 가난과 함께 절망만이 가득했던 그 시대를 지탱할 수 있었던 동력은 구봉서 그가 남긴 ‘웃음’이라는 ‘선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구봉서 그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에 대한 반항이었고 가난에 지치고 자유를 잃고 신음하는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또 다른 유형의 투사이기도 했습니다. 격동의 시대 참으로 많은 웃음을 선사해준 원로 희극인 故구봉서님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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